'film/TV'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6.12.21 다락방에서 찾은 80년대. 의개운천 (8)
  2. 2016.10.11 박보검 얼굴 리뷰
  3. 2016.09.22 구르미 그린 달빛에 완당이 나온다면
  4. 2016.08.21 올림픽 잡담 (2)
  5. 2016.03.22 영화 '조이Joy'에서 마주친 이사벨라 로셀리니 (2)
  6. 2016.02.26 치즈 인더 트랩 리뷰 : 이윤정 월드의 어떤 예쁨에 대하여
  7. 2016.02.16 응답하라 1988 리뷰 3 :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8)
  8. 2016.02.02 응답하라 1988에 바치는 MV :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9. 2016.01.27 응답하라 1988 리뷰 2 :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10)
  10. 2016.01.27 응답하라 1988 리뷰 1 :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4)

다락방에서 찾은 80년대. 의개운천






예전에 한창 문닫는 비디오가게가 속출하던 시기가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에 문닫는 가게가 폐업정리 세일을 하면 가서 비디오테입들을 하나둘씩 사모으곤 했었다.

비디오테입을 살때 나만의 원칙이 나름 있었는데, 1 비싼건 사지 않는다. 2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은 무조건 산다. 3 어릴때 좋아했던 영화, 4 앞으로 dvd로 발매될 일 없을 것 같은 안 유명한 영화 정도가 기준이었다.

비싼 걸 사지 않은 이유는, 대개 비싼 건 누구나 아는 명작들인데, 그런건 dvd로 틀림없이 발매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화질 안좋은 vhs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구매해서인지, 다락방을 뒤져 오랜만에 들춰본 나의 비디오 컬렉션은 이거 어디다 팔기도 뭐하고,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영화들이 수두룩한, 싸구려 마이너 취향의 컬렉션이 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손에 잡힌 의개운천.



주윤발, 왕조현 주연의 홍콩영화. 케이스에 적힌 카피가 어마어마하다.

​​살아서 의리, 죽어서 영웅!!
그 처절한 피와 눈물과 의리를 먹고자란 영웅-주윤발!
이제 그녀의 품안에서 말없이 죽고싶다.


뒷면은 더 대단하다.

​​"피로 얼룩진 영웅-주윤발, 홍콩 암흑가의 짓밟힌 육체-왕조현, 너만 살릴 수 있다면..."


기세만큼은 영웅본색 버금가는 신파 느와르일 것 같아서, 기대하며 플레이어에 걸었는데...



광저우에서 목숨걸고 홍콩으로 밀입국한 왕조현은 나쁜놈에게 강간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도망친다.

경찰인 주윤발이 실수로 왕조현을 차로 치게 되고, 갈곳없는 그녀는 기억을 잃은 척하며 주윤발 집에 얹혀 산다.

​​주윤발 엄마는 왕조현을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두는데. 엄마 대사가 너무 현대적이시다. 좋은 시어머니임을 마구 어필 중.

 




사치스러우며 이기적인 주윤발의 약혼녀와 순수하고 순박한 본토여성 왕조현을 대비시키는 방법은 너무나 요즘 k드라마스러워서 자꾸 웃음이 나는 것. 그 와중에 왕조현은 너무 예쁘시고. 

 




약혼녀 대사도 주윤발 모친의 대사와 비슷하게 그냥 막 너무 솔직하다.

너 별거 없지만 잘생겨서 좋아했다고ㅋㅋㅋ

네. 정말 잘생기셨네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잘생겼다.


주윤발 너무 나쁜 남자인게 약혼녀랑 헤어지는데 슬픔 1도 없고, 약혼녀가 왕조현 이민국에 신고하겠다니까 쿨하게 너 가슴수술한거 폭로하겠다고. (근데 가슴이 주사로 커지나?) ​​​



약혼녀 떨어져 나가고 주윤발과 왕조현은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피가 어마어마한 암흑가 느와르였던 것을 잊으면 안된다.

영화초반 왕조현을 강간하려했던 나쁜놈이 다시 그녀를 납치해서 주윤발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러고는 그녀 등에다가 거대한 문신을 새기고 강간까지 한다.

'암흑가의 짓밟힌 육체'라는 카피가 이런 뜻이었나. 강간당하는 장면까지 나와서 나는 좀 마음의 충격이 왔다. 80년대 영화가 이렇게까지 보여줘도 되는 거야. 아니 그리고 주윤발이 구하러 달려오고 있는데, k드라마라면 강간 당하기 직전에 남주가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서 구해줄텐데 관객들 마음에 이렇게 스크래치를 내도 되나. ㅠ _ㅠ

주윤발이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오니, 왕조현은 문신이 새겨진 등을 드러내고 그렁그렁한 눈을 한채 처연하게 바라보는데.... 이런 잔인한 신파라니...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반전이. 흑화한 왕조현은 경찰의 총을 빼앗아 자기를 강간한 놈을 쫓아서 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부터 껄껄 웃기 시작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선정성과 기개에 다시한번 감탄한다.

결국 주윤발, 왕조현, 나쁜놈. 세사람이 엉킨 총격전에서 나쁜놈 총맞고 아웃. 주윤발도 가슴에 총맞고 쓰러지는데. 왕조현은 울부짖으며 처음으로 그를 "오빠"라고 부른다. 여기서 끝나면 진정한 홍콩 신파 느와르가 됐을 텐데.
​​​​​​




주윤발 가슴에 있던 호출기가 총탄을 대신 맞음. ㅋㅋ (그시절에 삐삐라니. 홍콩 정말 잘살았나보다. ) 다 죽어가지만 남자는 가오있게 멋있는 대사 한번 던져줘야 하는데... 홍콩영화 대사가 대체적으로 그리 멋있진 않다. 염라대왕이 수속을 안밟아줘서 못갔다니...80년대인걸 감안하고 봐도 대사가 저게 뭐야.


시작은 비장한 영웅본색이었으나, 끝은 어째 최가박당이 된 것 같은 느낌적 느낌......피가 난무하고 눈물샘 자극하는 느와르를 기대한 내게 이런 허무함을 안겨주다니. ㅋㅋㅋ 어쨌든 남는 것은 주윤발의 잘생김과 왕조현의 어마무시한 예쁨이다. 




  ​



오랜만에 홍콩영화보니 새삼 80-90년대 기분이 떠올랐다. 그때의 홍콩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곳. 영화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당시 홍콩의 생활수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왕조현의 이모가 "곧 1997인데 뭐하러 홍콩에 왔어"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1997은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는 해. 세계를 휩쓸고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홍콩 뉴웨이브는 1997년을 앞두고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좋아하던 배우들이 홍콩을 떠나 다른나라로 이민을 가고, 어떤 배우들은 홍콩을 지키자고 시위를 하고.

홍콩 반환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곧 왕가위가 한국 시네필들에게 아주 안좋은ㅋㅋ 영향을 미칠 10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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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개미 2016.12.24 22: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포스팅 너무 잼있게 잘읽고갑니다. 저도 80년대 중반생이라 그 시절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희끗하게나마 기억나는데 이 글을 읽으니 향수가 마구마구 샘솟네요ㅎㅎ

    • d u s t y s n o b 2016.12.26 19:54 신고 address edit & de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뒤져서 더 재미있는 거 나오면 또 올릴게요.

  2. 화이트퀸 2017.01.06 23: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비디오테이프 빌려보던 시절 생각하면서 정독했습니다. ㅎㅎ 전 VHS 다 버리고 어릴 때 뮤직비디오 녹화했던 것들만 가지고 있네요.

    • d u s t y s n o b 2017.01.17 18:41 신고 address edit & del

      맞아요. 옛날에 뮤직비디오 모아서 보여주던 무슨 비디오자키인가 하는 프로그램 기억나네요. 뮤직비디오도 꽤 녹화 했었는데.. ㅎㅎ 지금은 스매싱펌킨스 내한공연 녹화한 것만 남아있어요.

  3. 오델베컴 주니어 2017.01.18 19: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예요... 개봉 당시에 매일 가서 보곤 했어요. 동시 상영관이 많았는데.... 멀리 부천까지 가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왕조현만큼 날 홀린 배우는 아직까지 없어요... 아직도 가전제품 매장 유리창에 기대어 텔리비젼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왕조현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푸른 조명에 비친 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던지.... 게다가 문신까지 당하는 장면은 정말 쇼크 그 자체.....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포스팅을 보니 새삼 반갑습니다. ^^

    • d u s t y s n o b 2017.01.20 12:48 신고 address edit & del

      의개운천이 개봉도 했었군요. 영화관에 매일 가서 보다니. 요즘 같으면 생각하기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사실 관람불가영화가 대부분이라서 영화로 못보고 왕조현을 cf로 처음 알게 됐어요.

  4. 주윤발 2017.04.21 05:3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영화제목과 영화내용이 서로 매치가 안되는게 홍콩영화인듯 합니다. 과장된 카피와 상업성에 목멘 80년대 홍콩영화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추억이... 자세하고 재밌는 설명 감사드립니다~

    근데 dustysnob 님은 male 이신지 femaie 이신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 d u s t y s n o b 2017.05.04 20:48 신고 address edit & del

      네. 인기있는 만큼 쏟아져 나오는 영화도 많고 말도 안되는 내용도 많았던 것 같아요.

박보검 얼굴 리뷰






미친 프로젝트 일정 때문에 연휴도 없이 9월을 보냈는데, 급기야 어제는 구르미그린달빛도 못보고, 크아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세자저하 MV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새 구르미 종영만 코앞으로 다가오고야 말았다. 


친한 후배가 라디오에서 박보검 얼굴 리뷰를 한다고 녹음들어가기 직전에 전화해서 SOS를 청하길래, 나의 평소 박보검 얼굴론을 한 이십여분 동안 전화로 쏟아냈다. 그 라디오도 바빠서 못듣다가 오늘에야 유튜브로 들어봤다. 


지난 주 토요일 라디오 심야식당, 세 명의 남자가 박보검 얼굴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그렇다. 종범 작가가 계속 언급하는 '어떤 제보자에 의하면', '또다른 제보자에 의하면' 이거 전부 다 나다. -_-;;;; 제보자 부분 아니라도 곳곳에 나의 박보검론이 녹아있다.


언젠가 글로 써야지 하다가 이런걸 뭘 글로 써 하고 말았던 건데, 쓸걸 그랬나보다. PD님과 기자님 터지시는 것을 보니... 사실 종범이와 전화끊고나서 아참, 박보검 비중격 얘기를 빼먹었네 했었는데 그건 나중에 글에다 써도 되겠다. 


십수년 전부터 둘이서 신나게 미소년미소녀 얼굴을 미학적으로 뜯어가며 토론하던 나날들이 이렇게 라디오에서 꽃피게 될 줄이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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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에 완당이 나온다면






'사춘기 메들리' 때부터 단숨에 팬이 되어버린 구르미그린달빛 감독님. 이 분 연출에 대해서는 2박3일 떠들어댈 수도 있지만 시간이 없어 아래 사진으로 대신한다.



이 변태 같은 롱샷...



그림이 너무 예쁜 데 비해 재미가 없어서 좀 아쉽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만 보면 재미있는데, 서사의 디테일이 상당 부분 생략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이야기가 뚝뚝 끊기는 느낌.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네이버TV캐스트의 주요 클립만 모아놓은 60분 영상같다. 


근데.... 사실 뭐 다 필요없다. 우리 세자 저하 얼굴이 개연성이지.  


마음이 울적할 땐 행복한 걸 떠올려 보자.



예를 들면, 이런 거.



아니면 이런 거.



엣헴... 




아. 정신차리고... 

오늘 이 포스팅을 쓰기 시작한 건 세자저하 때문이 아니고, 사실 이분 때문이다.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 극중에서는 김헌으로 나오는 분.


예전에 완당 김정희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이 김정희가 활동하던 때라서 극 중 안동김씨를 보니 바로 김정희 생각이 났다. 




정약용과 효명세자의 회동



드라마에서 세자 이영(박보검)이 정약용에게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그 시기에 정약용은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말년에 고향에 내려가 저술에 힘쓰며 후학을 기르던 시기여서 효명세자와 큰 관련은 없다. 정약용을 정조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효명세자에게 힘이 되어준 실제인물은 김정희와 그의 부친인 김노경이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노경과 김정희를 중용하였다. 


우리 세자 저하가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왕권강화에 힘쓰다가 21세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흑... 역사가 스포일러. 이 러브 스토리가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나..) 세자의 죽음으로 직격탄을 맞은 인물이 바로 이들 부자였다. 


효명세자가 죽자마자 안동김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노경을 모함하여 유배를 보내버린다. 그리고, 김정희는 그의 아들이라서 연좌제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에서 돌아왔다가, 또 모함을 받아 또 유배를 가고... 이걸 반복하는 동안 김정희의 유배생활은 도합 13년에 이른다. (김정희의 꼬장꼬장한 성격도 한몫 한 것 같지만) 유배도 가장 먼 제주도로, 거기서도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못나가는 위리안치 형을 받는 바람에, 할 일이 없어서 고독 속에 벼루 10개를 구멍내면서 완성한 것이 바로 추사체다. 


당시 제주도는 정말 척박했던 곳이고, 김정희는 입맛이 까다로운 왕가의 후손이셔서(김정희의 증조할머니가 영조대왕의 딸인 화순옹주다. 즉 김정희는 효명세자의 8촌 형) 집에다가 먹을 만한 것좀 보내달라는 편지를 줄기차게 보낸다. 어란을 보내달라, 말린 민어를 보내달라. 등등. (어란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말 비싼 식재료로, 어란에 빠진 양반이 집을 날려먹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 그러나 머나먼 제주로 배를 타고 오는동안 음식은 상해버리고.... 그래도 이 분 그 고초 속에서도 결국 장수를 누리셨다. 


아니 이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튼 우리에게 정약용은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완당은 추사체를 만든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생각보다 안 알려져 있는데, 완당은 당대 한-중-일 학계의 슈퍼스타였다. 글씨와 그림뿐만 아니라, 금석학, 고증학의 대가여서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들과 평생 교유하며 지냈고, 청나라, 왜(일본)에서도 김정희의 글씨 한번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그 당시 한류 스타였던 셈. 우리 세자 저하가 앞으로 낳게 될 훗날의 헌종은, 자기가 귀양보내놓고도 유배지에 있는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내라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아무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때문에 큰 고초를 겪긴 했지만, 결국 안동김씨는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19세기 조선을 서서히 기울게한 주역이라는 오명으로 남았고, 완당은 위대한 학자로 동북아 역사에 길이 남았다. 완당에 빠져 김정희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학자도 일본 사람일 정도이다. (여담인데, 예전에 완당에 대한 프로젝트 할 때, 문안을 공공기관에 컨펌받으려 보냈는데 어이없는 피드백이 온 것이 생각난다. 김정희가 안동김씨 때문에 귀양갔다는 구절을 빼라는 피드백이 온 것이다. 아마도 그 공공기관에 안동김씨 후손이 있었던 모양이다. )


완당에 대한 일화도 흥미로운 게 꽤 많고 19세기 동북아 학계에 영향을 미친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에, 정약용 대신 김정희가 드라마에 나와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만하고 꼬장꼬장하며 남 디스하는 것도 장난 아닌 그 성격 덕분에 캐릭터도 재미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김정희는 효명세자를 가르친 사부이며 그 옆에서 실제로 보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까칠한 왕세자와 더 까칠한 사부의 자비 없는 디스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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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잡담






요즘 너무 바빠서 TV 볼 시간이 없다. 그래도 이 와중에 올림픽은 슬쩍슬쩍 보고 있다.  운동에는 젬병인 저질 몸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듯한 운동선수들을 보면 넋을 잃게 된다. 올림픽 선수촌의 섹스 라이프를 다룬 해외 기사에서 올림픽 선수촌은 흡사 완벽한 신들이 모인 올림포스 신전과 같다고 표현한 걸 봤는데, 상상 해보니 넘나 멋진 것....;;; (어째서 섹스기사에서..)


1.

여자 수영 400m 혼영 카틴카 호수주

헝가리 금메달 8개 중에 3개를 이 언니 혼자 땄다. 세계 기록보다 몸 하나 이상 앞서가는데 미친 것 같다. 다른 선수들과 아예 다른 리그에서 홀로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이런 선수를 보면 언제나 짜릿하고 경외감이 든다. KBS캐스터가 '남편의 사랑의 힘인가요' 이딴 헛소리만 안했으면 딱 좋았을 동영상이지만 링크해본다. 아, 수영 경기 보다보니 수영장이 너무 가고 싶지만... 할일이 태산. 

http://sports.news.naver.com/rio2016/vod/index.nhn?uCategory=event&category=rio2016&id=221011&redirect=true


2. 

펜싱은 그냥 다 좋다. 뭔가 파파팍 지나갔는데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막고 찌르는 동작이 하나하나 보이니까, 짧은 전광석화 같은 순간에 그 많은 동작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멋있고...  풋워크와 찌르기가 너무 우아해서 춤을 보는 것 같은데, 이 동작들이 실제로 옛날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아찔하고... 가슴 찔린 저 순간 1포인트 잃는 게 아니라 그냥 죽는 거잖아. 싶으면서.. 우리나라 지고 있어도, 경기 관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재미있다. 


3.

사격은 룰을 잘 몰라서 예전에도 안보던 건데, 이번에 우연히 진종오 금메달 따던 순간에 라이브로 봤다. 서든데스 방식이라는 걸 처음 봐서 생소했는데, 한명씩 떨어진다니 쫄깃하고 멋있다. 그것보다 더 멋있었던 것은, 탈락한 선수들이 퇴장하지 않고 일렬로 앉아서 남은 경기를 지켜본다는 점이었다. 떨어진 순간 관중석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뒤에 놓인 의자에 돌아와 옆 국가 코치와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앉아서 우승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함께 지켜보는 것이.. 뭔가 라이벌리와 동료애가 함께 뭉쳐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멋있었다. 우아하고도 신사적인 스포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여자배구는.. 김연경선수 하나만으로도 너무 멋있었다. 언니는 왜이렇게 멋있으신건가요. 서브 넣을 때도 멋있고, 스파이크 넣을 때도 멋있고, 포효하는 장면도 멋있고, 욕할 때도 멋있고... 이번에 김연경 선수에게 꽂혀서 예전 김연경 선수 동영상을 몇개 찾아봤는데, 우리동네예체능에 잠깐 출연한 걸 보게 되었다. 거기서 배구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김연경 선수가 한 대답이 너무 좋았다. "자기가 좀 부족해도, 옆의 선수들을 믿으면 된다."라고... 사실 김연경 선수는 세계 최고 선수기 때문에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한 점이 없어서, 국가대표팀이든, 터키리그팀이든 어디에서든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야 할 선수일텐데... 그런 선수가 옆 동료들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1인자의 풍모를 느끼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안타깝게 떨어진 배구대표팀의 몇몇 선수들을 욕했지만, 김연경 선수는 아마 팀원들을 탓하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한다. 


5. 

여자기계체조 시몬 바일스. 마루운동이 특히 짱이었는데, 스프링처럼 팡팡 튀기는 게 인간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은 이런 완벽한 육체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발굴하는 재미로 보는 것 같다. 



쓰다보니 어째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여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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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화이트퀸 2016.09.05 23: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는 볼트 하이라이트만 봤습니다.
    김연경선수 활약을 라이브로 보지 못해서 아쉬워요. (배구계의 '메시'라던데..)

    • d u s t y s n o b 2016.09.07 16:44 신고 address edit & del

      지난 Decade는 볼트, 펠프스의 시대였죠. :-) 다음에는 또 어떤 초인이 나올까요. 김연경 선수는 신체조건, 공격, 리시브, 수비, 파워, 민첩성 모두 최고인 진짜 드문 선수라고 하네요.

영화 '조이Joy'에서 마주친 이사벨라 로셀리니

 

 

 

 

 

남편이 ‘조이Joy’가 너무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보러 갔다.

 

나는 원래 영화를 사전 정보 없이 보러 가기 때문에, 영화 시작하고 한 10분 동안은 바보처럼 ‘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랑 분위기가 너무 비슷한데’라고 생각했다. 그 감독이 이 감독이었던 것을… 어쩐지 제니퍼 로렌스부터 브래들리 쿠퍼, 로버트 드니로까지 출연진도 겹치더라니.

 

영화 중반쯤에는 두 번째로 바보 같이 ‘어엇!’하는 소리를 내뱉었는데, 바로 로버트 드니로의 애인으로 나오는 이탈리아계 노부인이 이자벨라 로셀리니 Isabella Rossellini 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말투와 제스처 하나 하나, 뼈속까지 이런 이탈리아계 상속녀가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완벽한 신스틸러였는데…

 

아냐 이건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내 기억 속의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본 것이다.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보였는데. 아... 온니....

 

 

영화 Joy (2015)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전설적인 헐리웃 여배우와 이탈리아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 사이에 태어난 딸. 날 때부터 셀럽이었던 그녀.

 

어렸을 때도 이렇게 예뻤고.

 

 

 

 

 

 

 

 

엄마인 잉그리드 버그만과 함께 있는 투샷은 요즘 셀럽들 사진보다 멋지다.

 

 

  

 

 

 

 

 

영화 속에서도 완벽한 미녀이자 팜므파탈이었고.

 

 

영화 Blue Velvet (1986)과 Death becomes her (1992)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였고.

 

연인이었던 데이빗 린치 감독과

 

연인이었던 게리 올드만과

 

 

 

 

특히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14년 동안 랑콤 전속모델을 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슈퍼모델의 시대에 세계 최고 화장품 모델을 장기집권한 미녀였다.

 

 

 

 

 

아래 사진들은 전형적인 80-90년대 미녀 스타일. 이런 flawless하고 블링블링한 80년대 스타일 넘 좋다.

  

 

 

 

 

 

 

 

사실 랑콤 모델일 때도 40대였는데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이렇게 나이 먹을거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영화 'Death becomes her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 불로불사의 약을 파는 마녀같은 여인으로 나온 게 너무 잘 어울렸다.  

 

 

 

 

 

 

 

 

 

 

지금도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주름진 얼굴에다, 연기도 잘해서 여전히 멋있긴 하지만… 다시 한번 옛날 사진을 뒤지며 그녀의 리즈 시절에 감탄하고 말았다. 전설적인 배우였던 엄마의 후광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 스스로 고전 영화 배우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어서, 게다가 영화배우들의 신비스러움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홀로 그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서 더욱 특별했던 스타라고 생각한다. 


최근 뉴스 보니 랑콤에서 60대에 들어선 이사벨라를 다시 모델로 쓰기로 했다는데... 역시 이사벨라 언니 클라스, 브랜드 자산을 살릴 줄 아는 랑콤에 존경을 표한다. 제니퍼 로렌스 보러 갔다가 이사벨라 로셀리니에 놀란 가슴. 덕분에 스압 만땅 포스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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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벼룩 2016.04.02 23:4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나도 절대 못 알아봤을 듯.ㅋㅋㅋㅋ
    난 프렌즈에 나온 걸 본 게 마지막이었던 거 같어. 무쟈게 옛날이구만...ㅋㅋㅋ

    • d u s t y s n o b 2016.04.04 18:09 신고 address edit & del

      프렌즈...;; 그게 언제야...설마 랑콤 모델하고 있을때 아니냐? ㅎㅎㅎ

치즈 인더 트랩 리뷰 : 이윤정 월드의 어떤 예쁨에 대하여

 

 

 

 

 

얼마 전 ‘치즈 인 더 트랩’과 ‘내일도 칸타빌레’에 나오는 자취방을 비교한 기사를 보았다. (기사 링크) 복층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있는 화려한 설내일의 자취방과 달리, 비좁고 싸구려 세간살이가 가득한 홍설의 자취방은 가난한 대학생의 현실을 반영한 풍경이라며 칭찬한 글이었다. 나도 열광했던 부분이긴 한데, 홍설의 자취방을 단지 현실적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11년 전 ‘태릉선수촌’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이윤정 감독의 팬이 되었다. 장르 특성상 드라마는 스토리가 연출보다 더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연출자보다는 작가가 언제나 이슈의 중심이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PD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윤정은 발군이었다.

 

이윤정 감독의 키워드 두 가지를 꼽자면 ‘청춘’과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청춘들의 설레는 사랑과 성장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조금은 특별하고 예쁜 공간에서 펼쳐진다. 영화에서 그런 감독을 찾아보자면 이와이 슌지가 떠오른다. 이와이 슌지가 일명 이와이 월드라 불리는 독특한 세계를 영화 속에 그려냈듯이, 이윤정도 드라마 속에 자신만의 스타일이 인장처럼 새겨진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래서 이윤정의 드라마를 볼 때면 공간의 어떤 특별한 예쁨에 눈이 가게 된다.

 

 

 

선수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8부작 청춘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4명의 국가대표가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땀 흘리고 고민하며, 사랑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배경이 선수촌인 만큼 예쁘게 꾸민 세트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젊은이들이 모인 선수촌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뛰는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변두리, 녹음 우거진 운동장, 땀과 열기 가득한 체육관은 순도 100% 젊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떤 면에서‘태릉선수촌’의 이런 특수한 지리적 설정은 드라마 ‘사춘기’(1996)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윤정 감독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던 황인뢰 연출의 ‘사춘기’는 춘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10대 소년의 성장드라마다. 시골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다소 떨어진 소도시인 춘천은, 눈 돌아가는 속도와 경쟁이라는 현실에서 한 발 비껴나 이 청춘들이 자랄 때까지 보호해주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되어준다. 더불어 춘천의 호젓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그런 분위기를 더한다. ‘사춘기’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달리는 소년 정준이 제일 먼저 기억나니까.

 

 

 

이윤정 감독의 최대 히트작 ‘커피프린스 1호점’(2007).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다시 봐도, 웬만한 드라마보다 영상이 세련돼 보인다. 그건 아마도 세심하게 빚어진 공간 연출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인물들의 집이 다 예뻤는데, 각 인물들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좋았다. 또한 그때까지의 트렌디 드라마의 무대가 주로 강남이었던 것과 달리 홍대와 부암동, 북촌 일대를 중심으로 촬영된 ‘커피프린스 1호점’은 단숨에 유행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당시 어떤 평론가는 ‘커피프린스 1호점’을 일컬어 ‘강북의 발견’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홍대와 북촌 붐의 시발점이었던 순간이었다.

 

 

 

 

   

‘하트 투 하트’(2015)는 저조한 시청률에 묻힌 게 좀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1%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전작인 커피프린스와 많이 비교되기도 했지만, 설정과 디테일도 훌륭했고, 최강희를 비롯한 배우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으며, 공간 연출에 있어서는 커피프린스보다 훨씬 진화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트투하트에는 홍대나 한남동 같은 힙한 공간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러 예쁘게 꾸민 공간도 없다. 헬멧을 쓰지 않고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심각한 대인기피증 환자 차홍도(최강희)의 공간은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어수선해 보인다. 하지만 홍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다. 심지어 채소도 이 안에서 길러 먹는다. 홍도는 이 우주 바깥으로 나가려면 징검다리를 밟고 개울을 건너가야 한다.   
 

 

 

홍도의 집보다 더 예뻤던 것은 고이석(천정명)이 근무하는 병원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원목 느낌이나 파스텔톤의 병원 인테리어와는 동떨어진, 하얀 벽에 구식 철제 캐비넷과 책상, 꼭 필요한 것만 갖춘 병원은 몇 십 년 전의 병원을 보는 듯하지만, 단정하고 소박하여 더욱 예쁘다. 이런 구식 병원에는 손님도 별로 없어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어도 의사선생님이 여유 있게 웃어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윤정의 공간 연출은 ‘하트 투 하트’에서부터 굳이 예뻐 보이려 하지 않는 무심한 아름다움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일링은 치인트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치즈 인 더 트랩’(2016) 홍설(김고은)의 방은 차홍도의 방에서 한발 더 나간다.

꽃무늬부터 체크무늬까지 통일감 없는 색감과 무늬의 소품이 뒤섞여있고, 로맨틱한 가구 대신 싸구려 칼라박스와 비키니 옷장이 들어차 있다. 홍설의 자취방은 비좁고 남루하지만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차홍도의 방과 비슷하다. 때문에 어떤 예쁨도 보여주지 않음에도 드라마 속에서 가장 아늑한 장소이며, 뭐라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공간이 바로 홍설의 대학교다. 시원하게 펼쳐진 호수와 노랗게 물든 가로수, 세련되고 웅장한 건물들은 마치 꿈꾸던 캠퍼스 라이프가 펼쳐질 것 같은 곳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평가하고 시기하고 이용하는 정글같은 인간 관계의 무대가 될 뿐이다. 홍설은 이곳에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사물함과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간다. 그 때문인지 아름답고 광활한 캠퍼스는 발도 뻗기 힘들만큼 비좁은 홍설의 방보다 오히려 숨막히는 곳처럼 느껴진다. 홍설과 유정의 연애는 캠퍼스 커플임에도 캠퍼스가 아닌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홍설네 국수집인 홍국수 역시 하트투하투의 병원처럼 트렌디하지 않은 공간이지만 예쁘다. 시원한 통유리가 아닌 드르륵거리는 미닫이 문이 정겹다. 깔끔한 블라인드가 아닌 갈대발이 걸려있는 것도 예쁘다. 문간에 걸려있는 빗자루는 너무나 실용적이라 귀엽다. 촌스런 옥색과 빨강 바구니는 경쾌한 포인트가 되어준다. 장사에 필요한 평범한 물건들이 늘어선 풍경은, 막 개업한 가게임에도 그 자리에서 한 십 년은 장사한 집처럼 보이게 한다.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이윤정 감독은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듯이 누가 보아도 예쁜 것들만 모아 감각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하트 투 하트’에서는 그런 장식을 걷어내고, 온전히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예쁜 공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치즈 인 더 트랩’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예쁘지 않은 것들을 모아서 예쁜 공간을 만들어냈다. 홍설의 방은 온갖 컬러와 잡동사니가 뒤섞여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세심한 배색 계획과 스타일링이 없다면 그 많은 요소들이 조화롭게 공간 속에 녹아들 수 없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홍국수의 간판 로고도 범상치 않은 그래픽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명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도록 마지막 터치를 해준다.

 

이것저것 섞어 놓는다고 누구나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렁설렁 그리는 듯해 보이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안자이 미즈마루는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말로 그의 스타일을 설명한다. 패션피플들의 금과옥조같은 1원칙은 '애써 노력하지 않은 듯한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멋' 아니던가. 내가 몇시간 동안 정성들여 멋 부린 것을 남이 모르게 해야 멋내기의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이윤정 감독은 이런 스타일링의 끝장을 보여준다. 무심한 듯 하지만 어느 곳보다도 매력적이고 예쁜 소우주. 이렇게 창조된 공간은 드라마 속에 이윤정 월드라는 인장을 새겨 놓는다.

 

 

 

한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태릉선수촌부터 치인트까지 거쳐 오는 동안, 청춘들의 공간이 광장과 거리에서 골방으로 좁혀져 간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을 받아주었던 거리, 홍대 앞의 실험 정신과 삼청동의 고즈넉함 등은 자본에 밀려 멀리 쫓겨나갔기 때문이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곳은 이제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젊은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골방 밖에 없는 듯해 보인다. 이윤정의 공간 연출의 변천사는 이렇듯 오늘날 청춘들이 처한 현실을 무의식 중에 반영하고 있다. 
 
일명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도 불리는 홍대 변화의 중요한 기점이 바로 ‘커피프린스 1호점’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실로 아이러니한 점이기도 하다. 이윤정 드라마 속 세상은 여전히 예쁘고 더욱 진화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언뜻 언뜻 비치는 이러한 현실은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한다.

 

 

 

각 이미지의 저작권은 해당 방송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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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리뷰 3 :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택이와 덕선이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중요한 사건의 발단은 늘 동룡이었다.

워낙 사고뭉치이기 때문에 그런 면도 있는데, 어쨌든 동룡이 저지른 일 때문에 덕선과 택은 5인방 가운데서 떨어져 둘만 남게 되는 (둘의 의지가 아닌) 외부적 요인을 계속 만나게 된다.

 

덕선과 택의 아름다운 추억인 10화 ‘memory’편의 바닷가 씬은, 동룡의 가출에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날 5인방이 다같이 바다에 갔지만 돌아오는 차에 자리가 모자라 덕선과 택은 낙오되고, 둘만 바다에 남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게 된다.

 

 

 

덕선이 처음으로 택이에게 보호받고 기대게 된 12화 바바리맨 사건은, 동룡이 친구들을 경양식집으로 불러들여서 생긴 일이었다. 여기서도 4명이 함께 갔지만 덕선과 택 둘만 복도에서 이 사건을 공유하게 된다.

 

 

 

유공연수원 운동장에서 자신을 안고 달리는 택의 품 안에서, 처음으로 택이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된 덕선(17화). 이 사건은 동룡이 덕선을 업어 운동장까지 데려오고, 또 동룡이가 치질 때문에 쓰러졌기 때문에 둘만 남아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사건. 서로의 마음을 속인 채 지내온 5년의 시간을 날려버린 사건인, 콘서트장 입구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덕선이 앞에 대국 기권까지 한 택이가 달려온 18화. 이날 덕선의 자존심을 자극해 이승환 콘서트장까지 오기로 가게 만든 것은 "또 차였구나"라는 동룡의 한마디였다. 게다가 콘서트장에 가라고 차로 실어주기까지 했으니...

 

 

 

 

동룡이는 택의 대국 일정부터 성격까지 모두 파악하고 엄마처럼 챙겨주면서,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새 둘의 사랑의 중개자 역할을 해온 것이다. 동룡과 같은 캐릭터를 통칭하여 문학에서는 방자형 인물이라고 부른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의 하인인 방자는 까불까불하고 극의 웃음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더불어 이도령의 사랑을 맺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방자는 주인공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기능적 인물이다. 동룡이가 벌인 일이 누구의 서사를 진행시켰는지를 살펴보면 동룡이 누구의 방자였는지가 드러난다. 즉 동룡이라는 캐릭터는 택이와 덕선의 서사를 위한 기능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방자형 인물은 익살맞은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대사를 통해 극의 골계미를 이끌어간다. 춘향전에서 방자가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꼬집는 역할을 맡는 것처럼 말이다. 응팔은 풍자드라마가 아니므로, 동룡은 풍자적인 대사를 읊는 대신에 작가가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역할을 맡는다.

 

라여사 없는 동안 세 남자가 잘 지냈는데도 왜 엄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지 궁금해하는 정환이에게 “니네 엄마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냐? 엄마가 없는데도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라고 동룡이 해주는 조언은 엄마들의 사랑을 보여준 5화의 주제를 함축한 대사였다.

 

“왜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까?”라고 의기소침하게 묻는 덕선이에게, “덕선아, 남이 널 좋아하는 거 말고 니가 누굴 좋아할 수도 있는 거야 그치?”라고 말해주는 14화 동룡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흔히 이 대사는 덕선이 각성하게 되는 계기라고들 하는데, 스토리 상으로는 그렇지만, 극의 구조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이 대사로부터 실제로 덕선이가 자기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회차까지는 너무나 멀고, 그 사이에 덕선은 이 대사를 곱씹어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덕선이의 각성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답이라기보다는, 토요일에 만나자는 약속을 취소한 택이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에게  “택이에 대한 내 마음이 왜 이렇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찾은 답에 가깝다.

 

동룡은 택이가 덕선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덕선이에게 “생각지도 못한 오랜 시간 동안 너를 좋아해온 누군가가 있을 거야.”라고 답해 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남이 널 좋아하는 거 말고, 니가 누굴 좋아할 수도 있는 거야”라고 한 대사는 작가가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 부추겨서 시작된 사랑 말고, 덕선이의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진짜 사랑이 누구인지를 찾아보라고 관객에게 던져주는 힌트이며, 앞으로 덕선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라고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는 순간이다.

 

이 밖에도 동룡이 극에서 맡은 역할은 더 있지만, 어쨌든 요약하자면 동룡은 방자형 인물이며 작가의 필요에 부응하는 기능적 인물이라는 점이다.

 

 

 

여기까지가 다라면 내가 응팔에 이렇게까지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응팔 팀은 어쩌면 보조적 인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동룡이라는 캐릭터에게 피와 살을 붙여주고, 가족을 주고, 그만의 고민과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런 방자형 인물들이 철저하게 주인공의 서사를 위해서만 존재할 뿐인 것과 다른 점이다.

 

앞서 말했던 동룡이 일으킨 사고들은 택이와 덕선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데에 소모되어 끝나지 않고, 동룡만의 서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가출사건이나 치질사건은 항상 부모님의 관심에 목말라 있던 동룡의 서사이기도 하며, 그렇게 원하던 부모님의 관심을 확인하는 계기로 연결되는 것이다.

 

가출 동룡

치질 동룡

 

응팔에서는 방자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주어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룡 역시 주변인물이 아닌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이 점이 가장 좋았다. 응팔은 거의 모든 쌍문동 인물들을 골고루 비중 있게 보여준다. 여기서 응팔이 왜 9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응팔은 크게 보면 매 회차마다 주제가 있고 그 회차 안에서 스토리가 끝나는 에피소드형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응팔처럼 에피소드형 구성을 취하면서 다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한정된 시간 내에 모든 인물의 스토리를 다 보여줄 수 없으므로 여러 해법을 찾는다.

 

‘하이킥’ 시리즈의 경우 크게 2~3개 정도의 사건을 한 회에 병렬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순재의 이야기와 손자 시윤 이야기가 각자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섹스앤더시티’ 시리즈의 경우 매 회차마다 같은 주제 아래 4명의 등장인물 스토리가 동시에 진행된다. 화자이자 공식 주인공은 캐리지만, 4명 모두 동등한 비중으로 등장하고, 매회마다 그 회의 주제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각자의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에 4명이 모두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응팔의 경우 ‘섹스앤더시티’의 방식을 택했다고 보인다. 회차별로 하나의 주제가 있고, 그 주제에 해당하는 최소 3팀 정도의 스토리가 유기적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9화 ‘선을 넘는다는 것’에서는 선영-무성, 보라-선우, 택-덕선 3커플의 선을 넘는 이야기(부가적으로 ‘정봉-백담사 그분’의 넘어서는 안 되는 선까지)가 나온다. 13화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는 동일, 성균, 무성, 거의 모든 아빠들의 부성애 스토리가 나온다.

 

9화 선을 넘는다는 것

 

 

 

응칠, 응사에서 주인공만이 가지고 있었던 가족을 응팔에서는 모든 5인방이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5인방은 모두 각자 자신들의 세계가 있고, 매회 동등한 비중으로 극의 주제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응팔 제작진의 노력은 5인방의 가족들까지 모두 끌어안는다. 등장인물이 많은 만큼, 모두를 적지 않은 비중으로 매 회차마다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다룬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미션이고 60분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응팔 팀이 처음부터 이것이 가족드라마라고 선언했던 것은, 단지 가족의 이야기를 주목해달라는 말뿐이 아니라, 응팔의 모든 가족이 주인공이고 그들에게 그만큼의 분량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던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러닝타임이 90분이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응팔은 에피소드형 구성을 택했음에도, 한편으로는 시리즈 전체에 쭉 이어지는 스토리가 있다. 그게 바로 남편찾기다. 에피소드형 구성은 갈등이 그 회차 내에서 모두 봉합되기 때문에 대개의 우리나라 드라마 특히 미니시리즈의 경우 에피소드형 구성을 택하기보다는, 다음 회차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갈등이 이어지는 방식을 택한다. 응팔은 그런 면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형 구성을 택했지만, 마약같은 남편찾기를 통해 약점을 보완하고 어쩌면 더한 장점으로 배가시켰다. 즉 에피소드형 구성에다가 16회짜리 남편찾기 스토리를 씨줄과 날줄처럼 결합시킨 것이다. (왜 16회인지는 뒤에서 서술하겠다)

 

이 남편 찾기는 마치 정환-덕선-택의 전형적인 삼각 러브스토리처럼 진행된 듯 보인다. 이 부분이 우리를 헷갈리게 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이런 삼각 러브스토리에서 한 쌍의 남주-여주를 찾기 때문이다. 셋 중에서 가장 시점이 친절하게 보여진 것은 정환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환이를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로, 택이를 안타고니스트(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막으려는 인물)로 읽었다. 그런데 주인공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타고니스트처럼 보였던 택의 행복한 모습이 극의 후반부를 지배하니, 기존 드라마 문법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당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 드라마는 덕선-택 이외의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이었다. 배우 박보검의 인터뷰를 보면 감독이 "너희 5명이 모두 주인공이야"라고 말했다는데, 결과적으로 감독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환, 택, 덕선의 사랑이야기가 각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각자의 사랑의 진행 속도가 다르고, 그들의 진행 곡선이 만나는 시점이 달랐을 뿐, 이 러브스토리는 처음부터 누가 이기고 지고 할 스토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환이의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정환이가 주인공이 아닌 것이 아니다.

정환이에게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도 응팔 월드 속 그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에게는 착한 아빠와 멋진 라여사가 있고, 사랑스러운 덕후 형이 있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사랑도 시작될 것이다. 이건 5인방과 모든 쌍문동 가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정환이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보자면, 이건 열병같은 첫사랑이 지나가고 난 뒤 그가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응사의 칠봉이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쓰레기의 안타고니스트로서 존재하고, 나정이와 쓰레기가 이어진 순간 칠봉이의 드라마상에서 존재가치는 신촌하숙집동기로 내려앉는다. 칠봉이에게도 가족이 있지만 그의 대사로만 존재할 뿐이다.)

 

전체 20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응팔 속에서, 남편찾기는 총 16회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3화의 첫 씬 브라질 떡볶이에서 만옥-조현이 선우를 가리켜 "쟤가 너 좋아하나 봐"라고 바람을 넣었을 때 시작하여, 18화 택이가 이승환 콘서트장에 나타나고, 정환이 지나간 고백을 하며 피앙세 반지를 던지는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19화 중국에서 택과 덕선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남편찾기가 아니라 후일담에 가깝다. 왜냐하면 19화가 시작하자마자 김주혁이 인터뷰에서 첫키스는 언제였냐고 묻는 질문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택이의 꿈키스가 있었던 "89년"을 외쳤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통해 작가와 감독은 19화를 남편찾기 판에서 빼버렸다. 그래서 어떤 관점에서 보면 북경 키스씬 전체가 택-덕선 서사의 가장 큰 플래시백이 아닌가 싶다.)

 

3화 브라질 떡볶이에서 시작된 남편찾기

 

18화 정환의 고백으로 끝난 남편찾기

 

 

그렇다면 3-18화까지 총 16회를 제외한 처음 1-2화, 마지막 19-20화는 쌍문동 사람들이 어떻게 이웃사촌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웃에서 가족이 되었는지를 보여준 순수한 가족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때문에 기존의 드라마 문법에 익숙한 사람들을 굉장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9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남편찾기 스토리를 메인 줄거리로 보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양념 정도로만 보아왔다면, 마지막 19-20화에서 많은 부분이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정환이 너무 일찍 마음을 정리하고, 덕선-택의 뒷이야기가 이미연의 대사로 간략히 나오고, 주인공이 아닌 듯 했던 선우-보라의 결혼이 마지막을 장식하다니… 하지만 이 드라마는 쌍문동 가족 이야기가 청춘들의 남편찾기 스토리를 감싸 안은 구조의 드라마인 것이다.

 

사실 응답 시리즈에서 드라마의 문법이나 법칙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법칙을 부수는 모험을 하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도를 읽지 못한 것이 관객들의 잘못도 아니다. 모든 의도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9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가장 큰 모험이었다고 보인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60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데 반해, 응팔은 90분의 러닝타임으로 진행되었다. 중간광고 시간까지 합치면 드라마가 끝날 무렵이면 2시간이 지나 있다. 이는 보통 드라마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시간이다.

 

관객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화의 러닝타임은 제작진에게 중요한 이슈다. 영화로 따지자면 평균 90~100분의 러닝타임의 2배인 3시간이 넘어가면 제작진에게 상당한 부담이 된다. 평균을 넘어가는 긴 러닝타임의 영화는 그래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 때, 혹은 그래도 된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혹은 감독이 분량 조절에 실패했거나)

 

응팔 제작진이 90분 러닝타임이라는 리스크가 큰 모험을 감수한 것은, “이것은 가족드라마입니다”라는 선언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90분 동안 모든 캐릭터를 애정을 담아 그려내고 풍부하게 쌓아 올린 덕분에, 쌍문동 사람들이 마치 우리 옆에 살아있는 이웃처럼 느껴지게 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응팔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순간의 허전함을 토로하는 것은 복고로의 시간여행에 대한 부작용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캐릭터의 풍성함과 세심한 디테일은 1988년 쌍문동을 실재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창조해냈다. 그래서 내 이웃처럼 느껴지던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여운처럼 남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응팔의 모든 허점과 논란을 덮고도 남는 매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응팔이 끝난지 한 달이 되어가지만, 오래도록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분석도 아닌, 비평도 아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나저나 나야말로 분량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네.

 

 

 

 

 

 

 

<응답하라 1988 리뷰 시리즈>

 

리뷰 1)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1 

리뷰 2)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  http://dustysnob.tistory.com/62 

리뷰 3)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6

 

<응답하라 1988 MV 시리즈>

 

사랑스런 덕선이에게 바치는 헌정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정환이를 위한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과 덕선, 그들이 사랑하기까지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  http://dustysnob.tistory.co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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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없는 아내 2016.02.18 01: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응팔이 끝난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잊지못하고 미련이남아요 자꾸만^^

    • d u s t y s n o b 2016.02.18 03:04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한달이 지났는데...정말 농약같은 드라마에요. :)

  2. 꼬부인 2016.02.19 00: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글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이런 글들이 드라마의 감동을 또 떠올리게 하네요~~

    • d u s t y s n o b 2016.02.19 17:41 신고 address edit & del

      긴 글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쯤 다시 한번 정주행해보려고요. ^^

  3. passion 2016.03.01 11: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직까지도 응팔을 잊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들렀다가 새로운 글이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기뻤답니다^^

    확실히 응팔은 많은 면에서 파격적인 드라마였죠. 그랬기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되고 반복되어온 패턴대로 복선을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한 시청자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전 1화만 보고 남편 후보를 정환이와 선우로 정해버렸고, 한참 안 보다가 나중에 15회쯤부터 볼 때엔 '택이가 누구야? 갑자기 왜 튀어나온 거야?' 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본 대로라면, 1화에서 그렇게 분량이 적었던 인물이 후반에서 분량이 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더군다나 동룡이가 의도치 않게 덕선-택 사이를 가깝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오히려 정환이에게 힘을 실어주는 증거라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남주'는 스스로 모든 위험 요소를 극복하여 결국엔 '여주'를 쟁취하는 역할이며, '서브남주'는 많은 도움에 힘입어 '남주'를 위협하는 역할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시청자들을 당황시키는 것도 마냥 칭찬만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방송이란 제작자와 시청자간의 소통 매체이지, 제작자만의 예술 행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기에 많은 제작자들이 변화하고, 또 시청자들 또한 모르는 새에 자연스럽게 형성한 선입견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감사함을 느낍니다.

    사실 남편 찾기의 결말이 나온 이후 서사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신 많은 분들이 '택이가 주인공이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저 역시 택이를 좋아하고, 전체 스토리에서 택이의 역할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굳이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말씀하신 대로 응팔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든 것은 "모두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니까요. 이런 드라마를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ㅠㅠㅠ

    또 다시 엄청나게 긴 댓글이 되어버렸네요.^^;;
    주인공과 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더 많이 하고 싶지만, 부담스러워 하실 수 있으니 그만두고 좋은 리뷰글이 제게 준 감동은 제 마음 속에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ㅎㅎ

    벌써 3월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d u s t y s n o b 2016.03.02 01:42 신고 address edit & del

      안녕하세요. 다시 오셨군요. ^^

      안그래도 지난번 남겨주신 글에 댓글을 달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넘쳐나서. 결국 이 리뷰까지 쓰게 되었지요.

      저도 하고 싶었던 말은 응팔은 완벽한 드라마가 아니며, 성공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그걸 덮고도 남는 매력이 바로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러다가 또 리뷰 한편 쓸 기세입니다. 더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자꾸자꾸 생기는 것이 이상하네요. 보통은 친구들한테 수다떨면서 말하고 끝나버렸는데 글로 계속 남기게 되다니. 게으른 저에게 이런 잉여력을 끌어내준 응팔이 신기합니다.

      그나저나 passion님께서 달아주신 댓글도 한편의 리뷰같아요. 잘 정리된 리뷰로 한 번 보고싶기도 하네요.

      저도 반가운 마음에 길게 썼습니다. 좋은 하루, 좋은 봄날 되세요.

  4. kmocha 2016.06.16 00: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응답시리즈에 대한 많은 리뷰를 읽었지만,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문체로 제작진의 주제의식을 간파한 글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댓글 달고 갑니다 ^-^

    • d u s t y s n o b 2016.06.17 15:55 신고 address edit & del

      아니. 반년이 지난 지금 응팔 리뷰를 보고 계시다니. 이러시면 너무 반갑습니다. ^-^ 저좋자고 쓴글인데 공감해주시니 고마워요.

응답하라 1988에 바치는 MV :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택이와 쌍문동 5인방 MV "국경의 밤(루시드폴)">

 

우리가 사랑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데는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진짜 지난번 뮤비만 만들고 끝내려고 했는데, ㅠ_ㅠ 또 맘대로 손이 움직여서 하나 더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마지막 잉여짓이 되길 바라며...

 

어린 나이에 남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독한 길을 걷게 된 택이지만, 항상 쌍문동 5인방과 함께여서 덜 외로웠다고 생각한다. 최택의 모델인 이창호 9단도 인터뷰에서 택이에게 친구가 많은 것이 부럽다고 하셨다던데.

 

특히 대국에서 지고 온 날, 다들 조심조심 택이의 눈치만 살피는데, 이 친구들은 거침없이 들어와 "너 발렸다며, 질때도 됐어"하고 면박주면서 "차라리 욕을 해"하고 택이를 터뜨려 주는 장면. 정말 좋았다. 그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는 택이가 진심 부러웠다.

 

후반부에 남편찾기에 다들 몰두하느라 쌍문동 5인방 우정이 좀 묻힌 것 같아 아쉬웠다. 이번 것은 순전히 나만 좋아할 듯한 내 취향의 뮤비지만, 어차피 내가 좋자고 만든 거니까...

 

근데, 루시드폴의 국경의 밤 가사가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의 우정과도 잘 어울려서 만든 건데... 가사가 잘 안들리네요. 폴님. ㅜ_ㅡ

 

 

 

 

 

"이런 띠바 됴깐네~" (욕을 그렇게 하면 쓰겠니.. 택아...)

 

 

 

 

 

 

 

<응답하라 1988 리뷰 시리즈>

 

리뷰 1)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1 

리뷰 2)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  http://dustysnob.tistory.com/62 

리뷰 3)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6

 

<응답하라 1988 MV 시리즈>

 

사랑스런 덕선이에게 바치는 헌정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정환이를 위한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과 덕선, 그들이 사랑하기까지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  http://dustysnob.tistory.co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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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리뷰 2 :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응팔 때문에 내 평생 처음으로 팬뮤비까지 만드는 덕질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뮤비를 편집하다가 불현듯 깨닫게 된 점이 있었다. 덕선이와 정팔이가 마주보고 웃는 투샷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둘만의 예쁜 장면도 좀 넣어주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정환이는 덕선이를 몰래 훔쳐보고, 뒤돌아서 웃음짓는다. 덕선이가 정환이를 향해서 웃을 때는 정환이가 딴 데를 본다. 둘은 시선을 마주치며 웃는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클립을 모아놓고 보니 전형적인 짝사랑男의 시선인 것이다.

 

 

 

반면에 택이와 덕선이는 주요 회차마다 둘이 마주보고 웃는 장면이 꼭 나온다. 정환이의 마음을 알게 된 택이 결국 고백을 포기하고 수면제를 먹고 잠으로 도망치는 16화의 엔딩을 보며, 둘이 이어지지 않을 것을 예감한 나는 이때 처음으로 뮤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주 슬픈 뮤비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만들면서 의외로 놀란 점은 덕선과 택이 같이 나오는 분량이 꽤 많아서 영상에 넣을 소스가 충분하다는 점이었고 -그때는 택이가 서브남주인 줄 알아서 그 사실이 의외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는 둘이 마주보고 웃는 씬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슬픈 브금을 깔아도 영상이 슬퍼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기야 극약처방으로 슬픈 가사를 밑에 자막으로 깔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슬프지가 않았다. ㅠ_ㅠ (슬픈 뮤비를 만들려면 다른 일로 눈물짓는 표정을 교차 편집하거나, 슬픈 대사를 오디오로 깔아야 가능할 뿐,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은 슬픈 그림이 1도 없는 것이다.) 

 

 

 

 

남편찾기가 끝난 후 정환이를 위한 뮤비도 하나 만들었는데, 정환이 시선은 덕선이가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을 때 덕선이를 향하는 장면이 너무나 많아서 붙여놓고 보니 너무나 슬픈 것이다. 내가 막 정환이 된 기분이 들며 울컥…

 

 


 

 

그러니까 카메라 연출이 처음부터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짝사랑은 정환이 혼자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도 알게 하려면, 정환이의 시점을 관객과 공유를 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환이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택이와 덕선이는 깨닫지 못했을 뿐 서로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시점으로 보여줄 필요가 없이 한 발 물러선 객관적인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혼란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덕선과 택이 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덕선이 시점 혹은 택이 시점에서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나왔다면 관객들은 눈치를 금방 챘을 것이다. 덕선이 시점이 일찍 나왔다면 남편찾기 게임은 애초에 끝났을 것이고, 택이 시점이 나왔다면 관객들이 택이에게도 정환에게만큼 동등하게 감정이입을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남류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일부러 보여주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택이의 시점으로 보이는 장면이 두세 번 정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바로 ‘넌나아몰’ 장면. “넌 바둑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없지”라고 하는 덕선이에게 택이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를 시전할 때, 다소 놀란 덕선이가 택이를 돌아보는 컷이 택이의 1인칭 시점처럼 카메라가 흔들린다. 이 때 택이는 덕선이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며 말한다. 아마도 관객들은 이때 처음으로 택이에게 한발 깊이 다가가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관객들에게 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택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또 하나는 택이의 공개고백 직전 장면인데, 바다에서 돌아와서 5인방이 방에서 치킨을 함께 먹으며 장난으로 덕선이한테 “니가 평생 택이 책임져”할 때, 이 때 택이가 덕선이를 훔쳐보는 시선이 나온다. 아주 잠깐 찰나처럼 나왔던 택이의 시점이었다. 덕선이의 반응을 기다리며 흘끔거리는 택이의 시선에 덕선이는 “그래. 내가 책임질게. 나야 좋지 뭐. 웬 떡이냐”하고 시선을 마주치며 웃어준다.

 

비록 장난처럼 지나간 듯 보이지만 이 때 택이는 짝사랑에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여기서 덕선이가 “미쳤냐” 혹은 “내가 얘랑 무슨” 같은 말을 했다면, 여기서 응답받지 못한 택이의 덕선을 향한 시선은 슬픈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즉 연출은 둘이 함께 마주보는 장면에서는 슬픈 그림을 단 한번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연출이 시종일관 ‘덕선을 향하는 정환의 시선’과 ‘마주보는 덕선과 택’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는데도 나는 정환이의 시선에만 눈이 팔려서 그걸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다시 한번 통탄하며 4:33 생각이 났다.

 

응답시리즈는 1997때부터 극중 소품, 등장인물 옷 색깔, 숫자 등을 통해 인물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장치를 계속 깔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응답시리즈 팬들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이 드라마에 숨겨진 복선을 찾아내고 분석하며 리뷰를 생성해낸다. 예를 들자면 응팔에서는 덕선이 노랑, 정환이 초록, 택이 빨강으로 상징되는데, 빨간 옷을 입은 인형과 노란 옷 인형이 나란히 붙어있고 초록 옷을 입은 인형이 떨어져있는 장면이 스치듯 나오는 것을 보고 남편은 정환이가 아닌 택이라고 추리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색깔이나 소품으로 깔아놓는 복선은 극의 큰 흐름에 중요한 요소가 아닌 이스터에그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재미로 보고 넘어갔다. 팬들의 넘쳐나는 분석과 리뷰들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재미도 있었고, 아 이건 매니아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이자 게임이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그 동안 팬들이 찾아낸 분석과 맞아떨어지는 것도 많이 있었지만, 가장 논란이 되었던 코드 하나만큼은 밝혀지지 않았다. 바로 4:33에 대한 이야기였다. 택이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택이와 관련이 있는 장면에서 유독 4시 33분을 가리키는 시계가 자주 나온다. 다들 어느 정도 분석한 것은 이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 이후에 수많은 분석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없다.

 

 

 

 

다 알다시피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연주자가 무대에 나와서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들어가는 곡이다.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걷어내고 나면, 사실상 이 곡의 의미는 심플하다. 청중들이 음악이라고 기대하는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4분 33초 동안 존 케이지가 의도한 진짜 음악이었던 콘서트 홀의 침묵과 청중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이미 연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떠올리고 보니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정환의 시선에 집중하는 동안, 덕선과 택의 진짜 이야기는 우리 눈앞에서 태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에 대한 은유같이 느껴졌다. (이게 응팔에서 4:33의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덕선과 택이 손잡고 영화보러 다니고 진짜 연애를 해도 그 둘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 동네 어른들처럼, 우리도 눈뜬 장님이지 않았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의 초연 당시, 청중들은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다가 나중에는 분노했고 평단은 뒤집어졌다. 존 케이지는 이 곡이 논란이 될 걸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덕선과 택이 이어져서 좋은 팬이지만, 끝끝내 정환 지지자들 혹은 많은 일반 관객들이 이 결말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이 논란이 어느 정도는 응팔이 풀지 못한 숙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것을 알고도 이렇게 만든 거라면, 작가와 감독이 제대로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런 연출 때문에, 덕선과 택이가 이어지길 바라던 팬들, 일명 선택러들은 ‘아마 안 될거야’라는 마음이다가,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의 희열을 제대로 느끼게 된 듯하다.

 

 

 

 


 

 

 

<응답하라 1988 리뷰 시리즈>

 

리뷰 1)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1 

리뷰 2)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  http://dustysnob.tistory.com/62 

리뷰 3)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6

 

<응답하라 1988 MV 시리즈>

 

사랑스런 덕선이에게 바치는 헌정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정환이를 위한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과 덕선, 그들이 사랑하기까지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  http://dustysnob.tistory.co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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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루 2016.01.31 20:5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확한 분석이세요. 저도 결말이 좋았지만 논란 일어나는건 어쩔수없다 생각했고, 이렇게까지 밀어부친 작감이 한편 대단하다 생각들더군요. 막회에 전 제대로된 플래시백이라도 나올까 했었는데 그것도 단호하게 안보여줌..작정했구나 싶더라구요.암튼 덕택에 드라마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정성들인 리뷰 감사해요

    • d u s t y s n o b 2016.02.01 00:07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래도 팬으로서 플래시백은 여전히 아쉽긴 하죠^^ 좀만 더 보여주지 싶은... 아쉬운점 많아도 이렇게 빠져든 데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던 듯해요. 공감 어린 댓글 반갑습니다~ :)

  2. ㄱㄴ 2016.02.02 19: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절대 동감입니다. 어남택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고 그저 택이 캐릭만 애정했었는데 꿈키스때부터 뭔가 쿰틀대면서 이전회를 뒤집어보고...그럼에도 어남류일수도 있는데 그러면 막장일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처남댁임이 드러낫을때의 그 희열은 뜻밖이었기땜에 더 컸어요. 더불어 작감의 수준을 시청자들은 각인효과라는 어남류에 호도되어 따라가지 못했었다는 생각도 ...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자감이 시청자에게 던진 메시지입니다.

    • d u s t y s n o b 2016.02.03 15:41 신고 address edit & del

      전 바닷가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다들 아니라고 해서. 제가 막눈인가 싶었어요. ㅎㅎ

  3. passion 2016.02.07 17: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많은 공감을 자아내는, 그리고 응팔이라는 드라마를 더욱 사랑하게 해주는 좋은 리뷰글들 감사합니다^^

    덕선을 중심으로 볼 때에 응팔에는 두 가지 사랑이 공존했다고 생각합니다. 덕선을 향한 정환의 짝사랑과 덕선과 택의 시나브로 사랑이죠. 로맨스가 주를 이루었던 전작들과 조금은 다른 방향의 결말을 맺은 것은 응팔이 "내 끝사랑은 가족입니다"라는 주제에 충실했던 결과라고 생각하고요. 둘 중 남녀간의 사랑 이외에 더 다양한 의미의 사랑과 인물들의 성장을 표현할 수 있고, 결국 '가족'이라는 의미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랑은 덕선과 택의 시나브로 사랑이라고 여긴 제작진이 처음부터 택이를 덕선의 남편으로 설정해놓았다고 보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하신 H2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네 명의 주인공 사이에 여러 사랑이 있었지만, 크게는 히로와 히카리의 뒤늦게 깨달은 사랑과 히로를 향한 하루카의 짝사랑이 있었죠(사실 히로의 "I love you"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합니다만, 히로가 결말까지 정말로 좋아한 것은 히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히카리=덕선, 히로=정환, 히데오=택’이라고 보시는 분들도, '히로=덕선, 히카리=택, 하루카=정환’이라고 보시는 분들도, '히카리=덕선, 히로=택, 히데오=정환’이라고 보시는 분들도 있기에 인물들의 매치와 결말 비교는 둘째치더라도 두 가지 사랑이 공존했고, 어느 쪽으로 경중이 치우치지 않고(물론 두 작품 모두 작가의 의도와 가깝거나 스토리의 핵심을 관통하는 쪽이 있기는 했죠) 모두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 응팔과 공통점을 갖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 두 가지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사실 정환의 짝사랑이 훨씬 더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되었던 데다가 시나브로 사랑은 정말 말그대로 시나브로, 덕선의 감정선 변화를 잘 따라가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남편찾기의 결말이 드러났을 때에도 조금은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죠. 지금까지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적잖은 아쉬움을 가지고 옥에 티로 여기고 있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지적하신 ‘덕선을 향하는 정환의 시선’과 ‘마주보는 덕선과 택’에서 무릎을 치고, 4:33의 의미 해석에서 한 번 더 쳤습니다. 4:33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가리킨다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제작진은 역량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그저 시청자들에게 불친절했을 뿐이다"라는 어떤 분의 말씀이 뼈저리게 와닿습니다. 결말에 직결되는 중요한 메시지를 절대로 직접 던져주는 법이 없고 은근하게 숨겨놓아 전개의 흐름을 잘 따라가서 제작진의 의도를 파악하는 이들에게만 보이도록 했으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부분일 수도 있지만, 응답하라 시리즈의 진정한 묘미이자 매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응팔이 제 마음에 준 크나큰 울림을 d u s t y s n o b님의 리뷰글로 다시금 떠올리게 되어서 후기같지 않은 후기처럼 적어보았는데요, 제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대신 d u s t y s n o b님과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계신 어떤 분의 블로그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댓글 창을 보면 응팔과 관련한 격렬한 토론의 현장도 보실 수 있답니다ㅋㅋ
    http://doctorcall.tistory.com/2151

    • d u s t y s n o b 2016.02.09 03:44 신고 address edit & del

      와. 댓글이 아니라 한편의 리뷰로군요. ^^

      가족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사랑이었다는 말씀을 듣고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요.

      두가지의 사랑이 공존했다는 부분 트룰리 공감합니다. 저도 그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지만 그것까지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져서 빼고 이야기했었는데요. 정환의 사랑이야기가 있고 덕선의 사랑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택의 사랑이야기가 또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각각의 진행속도가 다르고 그들의 진행곡선이 만나는 시점이 달랐을뿐.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덕선의 사랑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유일하게 변화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정환이의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정환이가 주인공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습관적으로 한쌍의 남주여주를 찾으려다 보니 더욱 헷갈린 것 같아요.

      더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여기에 댓글로 간단히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방대한 리뷰겸 댓글 고맙습니다. 그리고 추천해주신 포스팅도 감사합니다. 찬찬히 잘 볼게요. :) 반갑습니다.

  4. 꼬부인 2016.02.19 00:2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매력적인 드라마였어요. 님의 글도 매력적입니다~~~ ^^

  5. 브로콜리아 2016.03.21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뭐라고 남길 수 없을 정도로 개멋진 리뷰예요 ㅠ

응답하라 1988 리뷰 1 :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응답하라1988’의 남편찾기 대장정이 끝나고 쏟아져 나온 기사들을 봤는데, 다들 예상치 못한 결말에 당황하는 듯하다. 사실상 정환이가 피앙세 반지를 던져놓고 가는 18화 엔딩에서 게임은 끝이었다. 그런데도 내 주변의 정환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19화에 반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고, 20화가 끝나고는 “중간에 작가들이 남편을 바꾼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제기했다. 아무래도 정환이에게 감정이입을 한 사람들은 이 흐름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나는 3화까지는 좀 대충대충 봤다. 그랬던 이유는 1~2화에 ‘어머니의 죽음’ 같은 눈물 빼는 묵직한 에피소드가 연이어 나오는데 반해, 아직 캐릭터들이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은 상태라 몰입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환이의 서사에 깊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시청자들이 정환이에게 훅~ 빠지게 된 3화 수학여행 때 벽드신(벽+베드신:벽에 갇힌 사건)조차도 대충 보면서, ‘귀엽네, 재미있네’ 정도로 보던 라이트 시청자였다. 그 덕분에 오히려 드라마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그런 내가 보기에는 왜 택이었는지가 충분히 차곡차곡 잘 쌓여왔다고 생각하는데, 정환이에게 이미 몰입해버린 사람들에게는 덕선과 택을 이어주는 작은 단서들조차 모두 정환에 대한 서사로 읽혀왔던 듯하다. 아무튼, 다 끝나고 보니 시나리오 구조상 처음부터 택이가 덕선이의 짝이었다고 보이는데, 그 이유는 덕선이의 사랑이야기 주제가 “남녀 사이에 우정은 가능한가”로 귀결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응답하라 1988에는 BGM으로 당시 유행했던 노래들이 나온다. 그 중 정봉이의 주제가이다시피 했던 “It had to be you”는 1989년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주제가다. 이 영화의 주제가 바로 ‘남녀 사이에 우정은 가능한가’였다. 해리와 샐리는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이성적 감정 없는 친구 사이로만 지내다가 조금씩 서로에게 젖어 들고, 어느 날 선을 넘게 된다. 해리가 샐리를 위로해주다가 같이 잠자리를 가지게 된 것. 그렇지만 친구 사이가 깨질까 두려워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친구로 지내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서 결국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 해리가 샐리에게 고백하며 해피엔딩. 나는 덕선과 택의 관계 역시 결은 다르지만 '해리x샐리'와 비슷했다고 본다. 

 

물론 소꿉친구이자 불알친구였던 택과 덕선이 남녀로 마주서는 과정은, 이미 알 거 다 아는 성인인 상태에서 만나는 '해리와 샐리'보다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와 좀더 닮아있다. 응답시리즈의 공공연한 레퍼런스인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히로는 남들보다 일년 반이나 늦은 사춘기 때문에, 히카리에게 언제나 철없는 남동생같은 친구였다. 그러나 중3 무렵 갑자기 성장한 히로를 히카리가 이성으로 의식하게 되면서 이들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히로의 늦게 도착한 사춘기는 마치, 응팔 6화 엔딩에서 눈오는 날 불쑥 영화보자는 고백 아닌 고백을 전하면서, 한참이나 늦게 등판한 택이를 떠올리게 한다.

 

 

 

 

덕선이에게 택이는 언제나 귀여운 희동이었고, 이성이 아닌 그냥 불알 친구였다. 덕선이는 택이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없고, 엉덩이도 툭툭 치고, 손도 마음대로 잡고 다녔다. 그런 그들이 사랑에 빠지려면, 친구라는 선을 넘어서 상대방이 이성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덕선이가 택의 중국 대국에 동행했던 9화 “선을 넘는다는 것”이었다. 마냥 애기 같기만 했던 택이가, 예민하고 가차없는 승부사로서의 모습도 보여주고, 담배를 피우는 성인 남자로서의 모습도 보여준 회차였다. 이때 덕선에게 택이는 낯설게 보였을 것이다. 그건 우리의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택이를 낯설게 보는 덕선이 눈빛이 시종일관 보였기 때문이다.

 

 

 

 

 

 

가출한 동룡이를 잡으러 갔다가 둘만 바다에 남게 된 10화에서는 아예 대놓고 말하고 있다. 덕선에게 날아온 공을 몸으로 막아준 택이한테 “오~ 남잔데” 하자 “그럼 내가 남자지, 여자냐”라고 택이가 말한다. (이건 극본이 대놓고 떠먹여 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자, 봐. 이제 이 아이가 남자가 되어갈 거야'라고)

 

 

 

그 다음이 중요한데, 12화 바둑 대국에서 불계패하고 돌아온 택이가, 골목에서 덕선이 어깨에 기댄 밤. 자신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택을 보며 덕선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사실 덕선이는 이때부터 자기도 모르는 새 택이를 남자로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덕선이의 이런 모습은 다른 친구들한테는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덕선은 설렘은 있었을지언정, 떨림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정환이한테 아무 감정이 없던 수학여행 당시 벽에 갇힌 때는 물론이었고, 정환이한테 들이대던 시기에 침대에서 마주본 채 눈을 떴을 때도 정환이만 숨도 못 쉬었지, 덕선이는 떨림 1도 없이 “정환아 콘서트 같이 가자”라고 말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덕선이가 바바리맨을 마주쳤던 12화에서는 택이가 본격적으로 남자가 되기 시작한다. 덕선이는 바바리맨에게 쎈 척하며 대처하였지만, 결국은 택이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이건 둘만의 비밀이 된다. 그러고 난 후 속깊은 택이는 화장실 가는 덕선이를 조용히 따라가며 담배 피러 온 척하며 지켜준다. 항상 택이를 먼저 이끌고 누나처럼 챙겨주던 덕선이는, 이때 처음으로 남자인 택이에게 보호받고 기대게 된다.

 

 

 

 

17화, 몰래 숨어들어간 유공연수원 운동장에서 경비아저씨를 피하기 위해 택이는 발을 다친 덕선이를 번쩍 안고 달린다. 달리는 택이의 품 안에서, 덕선이는 자신이 택이를 남자로 의식하게 된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모든 관객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덕선이의 감정이 드러났지만, 사실상 극본은 그 전부터 꾸준히 택이가 어떻게 덕선에게 남자가 되어왔는가 하는 에피소드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그에 따라 아이 같아 보이던 택의 외모도 조금씩 남자답게 변해간다. 그건 덕선이가 택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이고, 아마도 연출이 섬세하게 의도한 바일 것이다.

 

 

이렇듯 소녀에게 소년이 남자가 되어가는 서사를 꾸준히 쌓은 것은, 극본상 처음부터 택이가 덕선의 짝이었기 때문이다. 택이 담배 피는 설정이나, 야한비디오 보는 설정은 단지 캐릭터에 갭모에를 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덕선에게 절대 이성일 수 없었던 친구가 남자로 느껴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5년 뒤, 중국 호텔에서 만났을 때(19화) 둘의 키스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택이 “왜 거짓말했어?”라고 묻자 덕선이는 “겁이 났어. 우린 친구잖아. 너와 어색해지는 건 상상할 수가 없어”라고 대답한다. 이 부분이 덕선이의 ‘사랑과 우정 사이’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데, 택이한테 남자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었지만 이 감정이 덕선이한테는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택이 남자로 느껴지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이 일어나버렸다.

 

그런데 선우나 정환이라면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놈들에게  마구 화낼 수도 있고 “다신 안봐”라고 소리지를 수도 있었지만, 베프인 만옥·조현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던 우리 택이, 나만이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택이와 서먹해진다는 것은, 그런 택이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마치 까탈스런 자기를 다 알고 있고, 자기 모든 속을 다 털어보일 수 있는 소중한 친구 해리를 잃기 싫었던 샐리처럼 말이다.

 

 

 

 

남편찾기가 종결되는 19화, 택이가 있는 중국으로 가기 직전, 스튜어디스 동료가 덕선이에게 말한다. “야,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딨냐”라고. 이 대사는 덕선의 러브 스토리 주제를 함축해서 말해준 한 마디임과 동시에 '이제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덕선에게 출발신호를 주는 신호탄 같은 대사였다. 

 

결국 응팔의 남편찾기는 덕선에게 택이가, 소년에서 남자가 되기까지를, 우정에서 사랑이 되기까지를 보여준 길고 긴 여정이었던 것이다.

 

 

 

 

 

 

 

 

 

 

<응답하라 1988 리뷰 시리즈>

 

리뷰 1)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1 

리뷰 2)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  http://dustysnob.tistory.com/62 

리뷰 3)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6

 

<응답하라 1988 MV 시리즈>

 

사랑스런 덕선이에게 바치는 헌정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정환이를 위한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과 덕선, 그들이 사랑하기까지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  http://dustysnob.tistory.co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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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4
  1. 꼬부인 2016.02.19 0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다시 정주행 하다보니 하나하나 보이더군요. 님같은 분의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공부하며 보는 드라마라닛...ㅎㅎㅎ 선택커플은 봐도봐도 질리질 않네요.. ^^

    • d u s t y s n o b 2016.02.19 17:38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요. 말해주지 않은 것들, 숨겨놓은 것들이 많아서 더 궁금해지고 다시 볼수록 빠져드는 커플인 것 같아요. :)

  2. 브로콜리아 2016.03.21 13: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진짜 왜이러시는거예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두사람 덕분에 꿈에서도 이 둘의 이야기를 바라보곤 했는데, 다시 가슴이 뛰잖아요 ㅠㅠㅠㅠㅠ

    • d u s t y s n o b 2016.03.21 17:53 신고 address edit & del

      당신도 선택러였구나. 현창의 세계에 온걸 환영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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