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에서 찾은 80년대. 의개운천






예전에 한창 문닫는 비디오가게가 속출하던 시기가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에 문닫는 가게가 폐업정리 세일을 하면 가서 비디오테입들을 하나둘씩 사모으곤 했었다.

비디오테입을 살때 나만의 원칙이 나름 있었는데, 1 비싼건 사지 않는다. 2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은 무조건 산다. 3 어릴때 좋아했던 영화, 4 앞으로 dvd로 발매될 일 없을 것 같은 안 유명한 영화 정도가 기준이었다.

비싼 걸 사지 않은 이유는, 대개 비싼 건 누구나 아는 명작들인데, 그런건 dvd로 틀림없이 발매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화질 안좋은 vhs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구매해서인지, 다락방을 뒤져 오랜만에 들춰본 나의 비디오 컬렉션은 이거 어디다 팔기도 뭐하고,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영화들이 수두룩한, 싸구려 마이너 취향의 컬렉션이 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손에 잡힌 의개운천.



주윤발, 왕조현 주연의 홍콩영화. 케이스에 적힌 카피가 어마어마하다.

​​살아서 의리, 죽어서 영웅!!
그 처절한 피와 눈물과 의리를 먹고자란 영웅-주윤발!
이제 그녀의 품안에서 말없이 죽고싶다.


뒷면은 더 대단하다.

​​"피로 얼룩진 영웅-주윤발, 홍콩 암흑가의 짓밟힌 육체-왕조현, 너만 살릴 수 있다면..."


기세만큼은 영웅본색 버금가는 신파 느와르일 것 같아서, 기대하며 플레이어에 걸었는데...



광저우에서 목숨걸고 홍콩으로 밀입국한 왕조현은 나쁜놈에게 강간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도망친다.

경찰인 주윤발이 실수로 왕조현을 차로 치게 되고, 갈곳없는 그녀는 기억을 잃은 척하며 주윤발 집에 얹혀 산다.

​​주윤발 엄마는 왕조현을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두는데. 엄마 대사가 너무 현대적이시다. 좋은 시어머니임을 마구 어필 중.

 




사치스러우며 이기적인 주윤발의 약혼녀와 순수하고 순박한 본토여성 왕조현을 대비시키는 방법은 너무나 요즘 k드라마스러워서 자꾸 웃음이 나는 것. 그 와중에 왕조현은 너무 예쁘시고. 

 




약혼녀 대사도 주윤발 모친의 대사와 비슷하게 그냥 막 너무 솔직하다.

너 별거 없지만 잘생겨서 좋아했다고ㅋㅋㅋ

네. 정말 잘생기셨네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잘생겼다.


주윤발 너무 나쁜 남자인게 약혼녀랑 헤어지는데 슬픔 1도 없고, 약혼녀가 왕조현 이민국에 신고하겠다니까 쿨하게 너 가슴수술한거 폭로하겠다고. (근데 가슴이 주사로 커지나?) ​​​



약혼녀 떨어져 나가고 주윤발과 왕조현은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피가 어마어마한 암흑가 느와르였던 것을 잊으면 안된다.

영화초반 왕조현을 강간하려했던 나쁜놈이 다시 그녀를 납치해서 주윤발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러고는 그녀 등에다가 거대한 문신을 새기고 강간까지 한다.

'암흑가의 짓밟힌 육체'라는 카피가 이런 뜻이었나. 강간당하는 장면까지 나와서 나는 좀 마음의 충격이 왔다. 80년대 영화가 이렇게까지 보여줘도 되는 거야. 아니 그리고 주윤발이 구하러 달려오고 있는데, k드라마라면 강간 당하기 직전에 남주가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서 구해줄텐데 관객들 마음에 이렇게 스크래치를 내도 되나. ㅠ _ㅠ

주윤발이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오니, 왕조현은 문신이 새겨진 등을 드러내고 그렁그렁한 눈을 한채 처연하게 바라보는데.... 이런 잔인한 신파라니...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반전이. 흑화한 왕조현은 경찰의 총을 빼앗아 자기를 강간한 놈을 쫓아서 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부터 껄껄 웃기 시작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선정성과 기개에 다시한번 감탄한다.

결국 주윤발, 왕조현, 나쁜놈. 세사람이 엉킨 총격전에서 나쁜놈 총맞고 아웃. 주윤발도 가슴에 총맞고 쓰러지는데. 왕조현은 울부짖으며 처음으로 그를 "오빠"라고 부른다. 여기서 끝나면 진정한 홍콩 신파 느와르가 됐을 텐데.
​​​​​​




주윤발 가슴에 있던 호출기가 총탄을 대신 맞음. ㅋㅋ (그시절에 삐삐라니. 홍콩 정말 잘살았나보다. ) 다 죽어가지만 남자는 가오있게 멋있는 대사 한번 던져줘야 하는데... 홍콩영화 대사가 대체적으로 그리 멋있진 않다. 염라대왕이 수속을 안밟아줘서 못갔다니...80년대인걸 감안하고 봐도 대사가 저게 뭐야.



홍콩느와르가 유행할 당시 나는 어려서 영화를 많이 못봤다. 그래서 의개운천도 제목만 알고 있었고, 비디오가게에서 무심코 집어들어 사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본 건데, 피가 난무하고 눈물샘 자극하는 느와르를 기대한 내게 이런 허무함을 안겨주다니. ㅋㅋ 어쨌든 남는 것은 주윤발의 잘생김과 왕조현의 어마무시한 예쁨이다.



  ​



오랜만에 홍콩영화보니 새삼 80-90년대 기분이 떠올랐다. 그때의 홍콩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곳. 영화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당시 홍콩의 생활수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왕조현의 이모가 "곧 1997인데 뭐하러 홍콩에 왔어"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1997은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는 해. 세계를 휩쓸고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홍콩 뉴웨이브는 1997년을 앞두고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좋아하던 배우들이 홍콩을 떠나 다른나라로 이민을 가고, 어떤 배우들은 홍콩을 지키자고 시위를 하고.

홍콩 반환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곧 왕가위가 한국 시네필들에게 아주 안좋은ㅋㅋ 영향을 미칠 10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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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6
  1. 김개미 2016.12.24 22: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포스팅 너무 잼있게 잘읽고갑니다. 저도 80년대 중반생이라 그 시절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희끗하게나마 기억나는데 이 글을 읽으니 향수가 마구마구 샘솟네요ㅎㅎ

    • d u s t y s n o b 2016.12.26 19:54 신고 address edit & de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뒤져서 더 재미있는 거 나오면 또 올릴게요.

  2. WhiteQueen 2017.01.06 23: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비디오테이프 빌려보던 시절 생각하면서 정독했습니다. ㅎㅎ 전 VHS 다 버리고 어릴 때 뮤직비디오 녹화했던 것들만 가지고 있네요.

    • d u s t y s n o b 2017.01.17 18:41 신고 address edit & del

      맞아요. 옛날에 뮤직비디오 모아서 보여주던 무슨 비디오자키인가 하는 프로그램 기억나네요. 뮤직비디오도 꽤 녹화 했었는데.. ㅎㅎ 지금은 스매싱펌킨스 내한공연 녹화한 것만 남아있어요.

  3. 오델베컴 주니어 2017.01.18 19: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내가 진짜 좋아하는 영화예요... 개봉 당시에 매일 가서 보곤 했어요. 동시 상영관이 많았는데.... 멀리 부천까지 가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왕조현만큼 날 홀린 배우는 아직까지 없어요... 아직도 가전제품 매장 유리창에 기대어 텔리비젼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왕조현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푸른 조명에 비친 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던지.... 게다가 문신까지 당하는 장면은 정말 쇼크 그 자체.....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포스팅을 보니 새삼 반갑습니다. ^^

    • d u s t y s n o b 2017.01.20 12:48 신고 address edit & del

      의개운천이 개봉도 했었군요. 영화관에 매일 가서 보다니. 요즘 같으면 생각하기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사실 관람불가영화가 대부분이라서 영화로 못보고 왕조현을 cf로 처음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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