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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V

다락방에서 찾은 80년대. 의개운천

d u s t y s n o b 2016. 12. 21. 02:43






예전에 한창 문닫는 비디오가게가 속출하던 시기가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에 문닫는 가게가 폐업정리 세일을 하면 가서 비디오테입들을 하나둘씩 사모으곤 했었다.

비디오테입을 살때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는데, 1) 비싼 건 사지 않는다 2) 좋아하는 배우의 작품은 무조건 산다 3) 어릴 때 좋아했던 영화라면 산다 4) 앞으로 dvd로 발매될 일 없을 것 같은 안 유명한 영화도 산다. 

비싼 걸 사지 않은 이유는, 대개 비싼 건 누구나 아는 명작들인데 그런건 dvd로 틀림없이 발매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화질 안좋은 vhs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구매해선지 다락방을 뒤져 오랜만에 들춰본 나의 비디오 컬렉션은 이거 어디다 팔기도 뭐하고,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영화들이 수두룩한, 싸구려 마이너 취향의 컬렉션이 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손에 잡힌 의개운천.



주윤발, 왕조현 주연의 홍콩영화. 케이스에 적힌 카피가 어마어마하다.

​​살아서 의리, 죽어서 영웅!!
그 처절한 피와 눈물과 의리를 먹고자란 영웅-주윤발!
이제 그녀의 품안에서 말없이 죽고싶다.


뒷면은 더 대단하다.

​​"피로 얼룩진 영웅-주윤발, 홍콩 암흑가의 짓밟힌 육체-왕조현, 너만 살릴 수 있다면..."


기세만큼은 영웅본색 버금가는 신파 느와르일 것 같아서 기대하며 플레이어에 걸었는데...



광저우에서 목숨걸고 홍콩으로 밀입국한 왕조현은 브로커에게 강간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도망친다.

경찰인 주윤발이 실수로 왕조현을 차로 치게 되고, 갈곳없는 그녀는 기억을 잃은 척하며 주윤발 집에 얹혀 산다.

​​주윤발 엄마는 왕조현을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두는데. 엄마 대사가 너무 현대적이시다. 좋은 시어머니임을 마구 어필 중.

 




사치스러우며 이기적인 주윤발의 약혼녀와 순수하고 순박한 본토여성 왕조현을 대비시키는 방법은 넘나 요즘 K드라마 스럽다. 그 와중에 왕조현은 너무 예쁘시고. 

 




약혼녀 대사도 주윤발 모친의 대사와 비슷하게 그냥 막 너무 솔직하다.

너 별거 없지만 잘생겨서 좋아했다고.

네. 정말 잘생기셨네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잘생겼다.


주윤발 나쁜 남자인게 약혼녀랑 헤어지는데 슬픔 1도 없고, 약혼녀가 왕조현 이민국에 신고하겠다니까 쿨하게 너 가슴수술한거 폭로하겠다고. (근데 가슴이 주사로 커지나요?) ​​​



약혼녀 떨어져 나가고 주윤발과 왕조현은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카피가 어마어마한 암흑가 느와르였던 것을 잊으면 안된다.

영화초반 왕조현을 강간하려했던 브로커 놈이 다시 그녀를 납치해서 주윤발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러고는 그녀 등에다가 거대한 문신을 새기고 강간까지 한다.

'암흑가의 짓밟힌 육체'라는 카피가 이런 뜻이었냐. 강간당하는 장면까지 나와서 나는 좀 마음의 충격이 왔다. 80년대 영화가 이렇게까지 보여줘도 되는 거야. 아니 그리고 주윤발이 구하러 달려오고 있는데, k드라마라면 강간 당하기 직전에 남주가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서 구해줄텐데 관객들 마음에 이렇게 스크래치를 내도 되나.

주윤발이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오니, 왕조현은 문신이 새겨진 등을 드러내고 그렁그렁한 눈을 한채 처연하게 바라보는데.... 이런 잔인한 신파라니...

그러나 여기서 갑자기 반전이! 흑화한 왕조현은 경찰의 총을 빼앗아 자기를 강간한 놈을 쫓아서 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부터 마음을 놓아버리고 껄껄 웃기 시작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선정성과 기개에 다시한번 감탄한다.

결국 주윤발, 왕조현, 나쁜놈. 세사람이 엉킨 총격전에서 나쁜놈 총맞고 아웃. 주윤발도 가슴에 총맞고 쓰러지는데. 왕조현은 울부짖으며 처음으로 그를 "오빠"라고 부른다. 여기서 끝나면 진정한 홍콩 신파 느와르가 됐을 텐데.
​​​​​​




주윤발 가슴에 있던 호출기가 총탄을 대신 맞음. ㅋㅋ 다 죽어가더라도 남자는 멋있는 대사 한번 던져줘야 하는데... 홍콩영화 대사가 대체적으로 내 취향이진 않다. 염라대왕이 수속을 안밟아줘서 못갔다니... 아니 뭐 왕조현이 불법체류자라서 던진 대사이긴 하지만 멋지지가 않아......


시작은 비장한 영웅본색이었으나, 끝은 어째 최가박당이 된 것 같은 느낌적 느낌......피가 난무하고 눈물샘 자극하는 느와르를 기대한 내게 이런 허무함을 안겨주다니. ㅋㅋ 어쨌든 남는 것은 주윤발의 잘생김과 왕조현의 어마무시한 예쁨이다. 




  ​



오랜만에 홍콩영화보니 새삼 80-90년대의 기분이 떠올랐다. 그때의 홍콩은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곳. 영화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당시 홍콩의 생활수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그 시절에 삐삐라니..) 

영화 속에서 왕조현의 이모가 "곧 1997인데 뭐하러 홍콩에 왔어"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1997은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되는 해. 세계를 휩쓸고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홍콩 뉴웨이브는 1997년을 앞두고 서서히 사그라 들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좋아하던 배우들이 홍콩을 떠나 다른나라로 이민을 가고, 어떤 배우들은 홍콩을 지키자고 시위를 하고.

홍콩 반환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곧 왕가위가 한국 시네필들에게 아주 안 좋은 ㅋㅋ 영향을 미칠 10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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