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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it Noir

모카포트

d u s t y s n o b 2019. 5. 21. 16:26


​얼마전 헬카페에서 원두를 사왔다. ‘하리오’로 내려 마신다고 하자, 사장님이 이 원두는 머신에 맞춰서 로스팅한 거라 수율이 높지 않으니 물을 뜨겁게 팔팔 끓여 브루잉하라고 조언해 주셨다. 집에 와서 그대로 내리니 헬카페 커피와 얼추 비슷한 맛이 났다. 하지만 왠지 이 원두 본연의 맛을 다 끌어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에스프레소로 마시고 싶은 욕구가 점점 강렬해지고...

결국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비알레띠 미니 익스프레스(Bialetti mini express)를 사달라고 하여 한달 앞서 땡겨 받았다.



아. 이 특이한 포트를 처음 본 순간 완전 꽂혀버렸다. 모양이 일반 모카포트와 좀 다르게 생겼는데, 잔을 보일러 위 플랫폼에 직접 올려놓고 바로 커피를 받는 구조로 되어있다. 덕분에 잔도 같이 데워진다. 에스프레소 머신 위에 엎어 놓아 따뜻하게 데운 잔에 에스프레소를 내주던 이탈리아 카페들이 떠오른 것이다. (데미타세잔 없으니 큰 잔에 내주겠다고 한 우리동네 스타벅스여 안녕!)



가스불 위에 올려놓으면 1분쯤 지나 쪼로록 하는 소리가 나며 커피가 내려오기 시작한다. 귀엽다. 귀엽죠? 나만 귀엽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헬카페 원두 특유의 부드러운 쓴맛이 잘 농축되었다. 아무래도 머신보다는 압력이 높지 않아서 에스프레소라기보다는 룽고같은 느낌으로 완성. 물론 크레마도 없고. 그래도 너무 행복했다.

사실 집에 십 년쯤 된 비알레띠 브리카(Bialetti Brikka) 4인용이 있다. 잔에 따를 때면 봄눈처럼 사라질지라도 브리카는 크레마가 생긴다. 



나란히 놓고 보니 브리카가 거인같은 느낌.



밑바닥을 보니 십 년전 제품 브리카는 made in Italy 라고 새겨져 있다.



요즘 나온 미니 익스프레스는 made by Bialetti라는 애매한 문구가 적혀 있다. in과 by의 차이는 크지요. 박스를 보니 이탈리아 본사의 엄격한 품질관리 하에 루마니아에서 생산...;; 루마니아는 몸체에 박지 못하고 상자에만 적어놨구나. 

이탈리아 있을 때 숙소 주인이 비알레띠가 중국에 인수될 거니 그 전에 사두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런데 그 말조차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린 게, 얼마 전 비알레띠 파산 위기 뉴스가 나왔기 때문. 가장 큰 원인은 캡슐머신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생겨서라고. 모든 이탈리아 가정에는 모카포트가 하나씩 있다고들 하는데, 요즘은 캡슐머신이 모카포트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 스타벅스와 캡슐머신에 무릎꿇은 이탈리아라니... 슬프다. 

시칠리아에서 며칠간 묵었던 숙소가 떠오른다. 그곳은 여행자보다는 장기 투숙하는 대학생들이 많은 숙소여서 뭔가 남자셋 여자셋의 하숙집같은 느낌이었다. 내 방에 부엌과 연결된 문이 있었는데, 그곳에 묵는 모든 이들이 아침이면 한 사람씩 부엌에 와서 내 방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어 차오~! 인사를 건네고 조그마한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여먹었다. 진짜 코딱지만큼 나온 에스프레소를 나한테 건네며 한모금 마실래? 라고... 고맙긴 한데, 그걸 누구 코에 붙이니 하하... 그래도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자기 커피를 망설이지 않고 내밀던 그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

혹시라도 나처럼 헤맸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비알레띠 미니 익스프레스 팁 :


중간 연결부위에서 증기만 새어나오고 커피는 추출되지 않는 증상으로 연달아 실패했는데 잘 살펴보니 내가 필터를 뒤집어 끼웠던 것. 모카포트를 십 년 쓰고도 이걸 몰랐다니 어이가 없다... 필터가 사진처럼 볼록하게 보여야 한다. 필터를 제대로 끼우고도 증기가 샌다면 커피 분쇄도가 잘못된 경우일 확률이 높다. (모카포트는 핸드밀을 쓴다면 가장 고운 분쇄도로 갈고, 전동 원두 그라인더를 쓴다면 머신용에 가깝게 갈고, 분쇄되어 있는 원두를 살 경우 에스프레소용으로 구매할 것.) 보일러에 물을 한계선 위로 넘겨서 붓지 말고, 접합부는 꽉 잠궈야 한다. 타이머로 측정해 보니 1인용은 추출 시간이 3분을 넘어가지 않는다. 만약 5분이 넘도록 커피 나올 기미가 안보이면 뭔가 잘못된 것. 모카포트 태워먹기 전에 불을 끄시오.



사발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일사(ILSA) 제품으로 구매했다. 뭔가 튼튼해 보여서 산 건데, 받아 보니 이걸로 결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Gas ring reducer라고 써있던 것. 그냥 사발이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불꽃이 모카포트 위로 넘어가지 않게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제품이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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