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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V

청춘에 바치는 찬가. 허니와 클로버

d u s t y s n o b 2008. 5. 6. 21:11






청춘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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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작업실, 졸업을 언제할지 알 수 없는 고학번 선배, 시간제 아르바이트, 돌려받지 못할 짝사랑, 진로에 대한 고민들.. 허니와 클로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바로 '지금'의 대학생들의 모습이고, 누구든 스무 살에 겪어볼만한 고민들이다.

 

마야마와 아유미가 스토킹하다 마주치는 장면처럼, 성격이 뚜렷한 캐릭터들이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소소하면서도 특별하다. 그림이라는 소재가 사랑의 매개물이 되면서 동시에 장애물이 되는 장치도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이들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러하듯이, 꿈꾸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을 갖는다.
  
"청춘영화란 이렇게 만들어야 해" 극장을 나오며 같이 본 친구에게 말했다. 마치 청춘의 한 페이지를 고스란히 잘라 옮겨놓은 것 같은 아련함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그러나, 나는 이내 깨닫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스무 살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산뜻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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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청소년 성장 드라마 붐의 효시가 된"사춘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 10대이던 나는 그 드라마를 매우 좋아했지만, 내 일상은 왜 저들의 그것처럼 산뜻하지 못할까 하는 괴리감도 들곤 했다. 그 이유를 나는 20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사춘기"에는 언제나 적당한 고민과 적당한 일탈이 있었고, 감정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다가도 적당한 자리를 찾아가곤 했다. 그들의 일탈은 언제나 그 회에서 마무리가 되었고, 피아노가 주선율인 깔끔한 배경음악은 늘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괜찮아. 이건 모두 지나갈 일들이야." 그것이 바로 그 드라마가 주는 안온함의 정체였던 것이다.

허니와 클로버의 주인공들은 이 모든 것이 지나갈 일들임을 잘 알고 있다. 고물차를 달려 간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으며 아유미는 말한다. "먼 훗날 돌이켜볼 청춘의 한 컷, 젊음의 하이라이트를 듬뿍 담아 찍겠습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한다. 다케모토는 실연을 당하고는 자신을 찾기 위한 자전거 여행을 떠나고, 마야마는 일그러진 짝사랑을 하면서도 타락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맹목적인 짝사랑을 하는 아유미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이들은 매 순간순간, 지금의 이 고통과 절망도 아름다운 청춘의 일부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 내내 주인공들이 '청춘'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여러 번 언급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고통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일탈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온다.

영화 전반의 이런 낙관적인 태도가 허니와 클로버를 산뜻한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춘이 이렇듯 설레면서도 담백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기실 젊음은 이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젊은이가 아닌 세대가 청춘에 바치는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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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함을 가르쳐 주는 옛 이야기가 하나. 한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만족해 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숲을 지날 때는 숲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젊음의 한가운데를 지날 때는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젊음은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이 순간의 사랑과 고통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간혹 끝간데 없이 달리기도 하는 것이며, 젊음의 열정이 비극으로 끝나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동시대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는 청춘영화들이 있다. <이유없는 반항>부터, <내멋대로 해라>, <이지 라이더>, <헤더스>, <청춘스케치(reality bites)> 까지.. 어떤 영화는 영화사에서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청춘스타만 반짝 배출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젊은이들은 그 영화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는 청춘영화들 중 상당수가 <허니와 클로버>와는 달리, 미래를 알 수 없는 그들의 불안과, 그로부터 오는 무모함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허니와 클로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춘영화지만, 우리가 그러기를 또는 그랬기를 바라는 청춘에 가깝다. “지금은 청춘이니까 괜찮아. 언젠가는 다 좋아질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한 영화의 낙관적 분위기는 젊은이들의 태도라기보다는 하나모토 교수가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다. 이 영화는 이렇듯 젊음이라는 숲을 이미 지나온 이가 청춘에 바치는 찬가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더 아련하고, 눈부시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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