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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6 치즈 인더 트랩 리뷰 : 이윤정 월드의 어떤 예쁨에 대하여

치즈 인더 트랩 리뷰 : 이윤정 월드의 어떤 예쁨에 대하여

 

 

 

 

 

얼마 전 ‘치즈 인 더 트랩’과 ‘내일도 칸타빌레’에 나오는 자취방을 비교한 기사를 보았다. (기사 링크) 복층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있는 화려한 설내일의 자취방과 달리, 비좁고 싸구려 세간살이가 가득한 홍설의 자취방은 가난한 대학생의 현실을 반영한 풍경이라며 칭찬한 글이었다. 나도 열광했던 부분이긴 한데, 홍설의 자취방을 단지 현실적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11년 전 ‘태릉선수촌’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이윤정 감독의 팬이 되었다. 장르 특성상 드라마는 스토리가 연출보다 더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연출자보다는 작가가 언제나 이슈의 중심이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PD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윤정은 발군이었다.

 

이윤정 감독의 키워드 두 가지를 꼽자면 ‘청춘’과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청춘들의 설레는 사랑과 성장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조금은 특별하고 예쁜 공간에서 펼쳐진다. 영화에서 그런 감독을 찾아보자면 이와이 슌지가 떠오른다. 이와이 슌지가 일명 이와이 월드라 불리는 독특한 세계를 영화 속에 그려냈듯이, 이윤정도 드라마 속에 자신만의 스타일이 인장처럼 새겨진 공간을 창조해낸다. 그래서 이윤정의 드라마를 볼 때면 공간의 어떤 특별한 예쁨에 눈이 가게 된다.

 

 

 

선수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8부작 청춘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4명의 국가대표가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땀 흘리고 고민하며, 사랑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배경이 선수촌인 만큼 예쁘게 꾸민 세트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젊은이들이 모인 선수촌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 뛰는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서울이지만 서울 같지 않은 변두리, 녹음 우거진 운동장, 땀과 열기 가득한 체육관은 순도 100% 젊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떤 면에서‘태릉선수촌’의 이런 특수한 지리적 설정은 드라마 ‘사춘기’(1996)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윤정 감독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던 황인뢰 연출의 ‘사춘기’는 춘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10대 소년의 성장드라마다. 시골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다소 떨어진 소도시인 춘천은, 눈 돌아가는 속도와 경쟁이라는 현실에서 한 발 비껴나 이 청춘들이 자랄 때까지 보호해주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되어준다. 더불어 춘천의 호젓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그런 분위기를 더한다. ‘사춘기’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달리는 소년 정준이 제일 먼저 기억나니까.

 

 

 

이윤정 감독의 최대 히트작 ‘커피프린스 1호점’(2007).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다시 봐도, 웬만한 드라마보다 영상이 세련돼 보인다. 그건 아마도 세심하게 빚어진 공간 연출 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인물들의 집이 다 예뻤는데, 각 인물들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더욱 좋았다. 또한 그때까지의 트렌디 드라마의 무대가 주로 강남이었던 것과 달리 홍대와 부암동, 북촌 일대를 중심으로 촬영된 ‘커피프린스 1호점’은 단숨에 유행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당시 어떤 평론가는 ‘커피프린스 1호점’을 일컬어 ‘강북의 발견’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홍대와 북촌 붐의 시발점이었던 순간이었다.

 

 

 

 

   

‘하트 투 하트’(2015)는 저조한 시청률에 묻힌 게 좀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1%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전작인 커피프린스와 많이 비교되기도 했지만, 설정과 디테일도 훌륭했고, 최강희를 비롯한 배우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으며, 공간 연출에 있어서는 커피프린스보다 훨씬 진화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트투하트에는 홍대나 한남동 같은 힙한 공간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러 예쁘게 꾸민 공간도 없다. 헬멧을 쓰지 않고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심각한 대인기피증 환자 차홍도(최강희)의 공간은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어수선해 보인다. 하지만 홍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다. 심지어 채소도 이 안에서 길러 먹는다. 홍도는 이 우주 바깥으로 나가려면 징검다리를 밟고 개울을 건너가야 한다.   
 

 

 

홍도의 집보다 더 예뻤던 것은 고이석(천정명)이 근무하는 병원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원목 느낌이나 파스텔톤의 병원 인테리어와는 동떨어진, 하얀 벽에 구식 철제 캐비넷과 책상, 꼭 필요한 것만 갖춘 병원은 몇 십 년 전의 병원을 보는 듯하지만, 단정하고 소박하여 더욱 예쁘다. 이런 구식 병원에는 손님도 별로 없어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수다를 떨어도 의사선생님이 여유 있게 웃어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윤정의 공간 연출은 ‘하트 투 하트’에서부터 굳이 예뻐 보이려 하지 않는 무심한 아름다움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타일링은 치인트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치즈 인 더 트랩’(2016) 홍설(김고은)의 방은 차홍도의 방에서 한발 더 나간다.

꽃무늬부터 체크무늬까지 통일감 없는 색감과 무늬의 소품이 뒤섞여있고, 로맨틱한 가구 대신 싸구려 칼라박스와 비키니 옷장이 들어차 있다. 홍설의 자취방은 비좁고 남루하지만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차홍도의 방과 비슷하다. 때문에 어떤 예쁨도 보여주지 않음에도 드라마 속에서 가장 아늑한 장소이며, 뭐라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공간이 바로 홍설의 대학교다. 시원하게 펼쳐진 호수와 노랗게 물든 가로수, 세련되고 웅장한 건물들은 마치 꿈꾸던 캠퍼스 라이프가 펼쳐질 것 같은 곳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평가하고 시기하고 이용하는 정글같은 인간 관계의 무대가 될 뿐이다. 홍설은 이곳에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사물함과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간다. 그 때문인지 아름답고 광활한 캠퍼스는 발도 뻗기 힘들만큼 비좁은 홍설의 방보다 오히려 숨막히는 곳처럼 느껴진다. 홍설과 유정의 연애는 캠퍼스 커플임에도 캠퍼스가 아닌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홍설네 국수집인 홍국수 역시 하트투하투의 병원처럼 트렌디하지 않은 공간이지만 예쁘다. 시원한 통유리가 아닌 드르륵거리는 미닫이 문이 정겹다. 깔끔한 블라인드가 아닌 갈대발이 걸려있는 것도 예쁘다. 문간에 걸려있는 빗자루는 너무나 실용적이라 귀엽다. 촌스런 옥색과 빨강 바구니는 경쾌한 포인트가 되어준다. 장사에 필요한 평범한 물건들이 늘어선 풍경은, 막 개업한 가게임에도 그 자리에서 한 십 년은 장사한 집처럼 보이게 한다.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이윤정 감독은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듯이 누가 보아도 예쁜 것들만 모아 감각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하트 투 하트’에서는 그런 장식을 걷어내고, 온전히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예쁜 공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치즈 인 더 트랩’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예쁘지 않은 것들을 모아서 예쁜 공간을 만들어냈다. 홍설의 방은 온갖 컬러와 잡동사니가 뒤섞여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세심한 배색 계획과 스타일링이 없다면 그 많은 요소들이 조화롭게 공간 속에 녹아들 수 없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홍국수의 간판 로고도 범상치 않은 그래픽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명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도록 마지막 터치를 해준다.

 

이것저것 섞어 놓는다고 누구나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렁설렁 그리는 듯해 보이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안자이 미즈마루는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말로 그의 스타일을 설명한다. 패션피플들의 금과옥조같은 1원칙은 '애써 노력하지 않은 듯한데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멋' 아니던가. 내가 몇시간 동안 정성들여 멋 부린 것을 남이 모르게 해야 멋내기의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이윤정 감독은 이런 스타일링의 끝장을 보여준다. 무심한 듯 하지만 어느 곳보다도 매력적이고 예쁜 소우주. 이렇게 창조된 공간은 드라마 속에 이윤정 월드라는 인장을 새겨 놓는다.

 

 

 

한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태릉선수촌부터 치인트까지 거쳐 오는 동안, 청춘들의 공간이 광장과 거리에서 골방으로 좁혀져 간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을 받아주었던 거리, 홍대 앞의 실험 정신과 삼청동의 고즈넉함 등은 자본에 밀려 멀리 쫓겨나갔기 때문이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곳은 이제 없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젊은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골방 밖에 없는 듯해 보인다. 이윤정의 공간 연출의 변천사는 이렇듯 오늘날 청춘들이 처한 현실을 무의식 중에 반영하고 있다. 
 
일명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도 불리는 홍대 변화의 중요한 기점이 바로 ‘커피프린스 1호점’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실로 아이러니한 점이기도 하다. 이윤정 드라마 속 세상은 여전히 예쁘고 더욱 진화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언뜻 언뜻 비치는 이러한 현실은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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