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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88’의 남편찾기 대장정이 끝나고 쏟아져 나온 기사들을 봤는데, 다들 예상치 못한 결말에 당황하는 듯하다. 사실상 정환이가 피앙세 반지를 던져놓고 가는 18화 엔딩에서 게임은 끝이었다. 그런데도 내 주변의 정환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19화에 반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고, 20화가 끝나고는 “중간에 작가들이 남편을 바꾼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제기했다. 아무래도 정환이에게 감정이입을 한 사람들은 이 흐름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나는 3화까지는 좀 대충대충 봤다. 그랬던 이유는 1~2화에 ‘어머니의 죽음’ 같은 눈물 빼는 묵직한 에피소드가 연이어 나오는데 반해, 아직 캐릭터들이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은 상태라 몰입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환이의 서사에 깊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시청자들이 정환이에게 훅~ 빠지게 된 3화 수학여행 때 벽드신(벽+베드신:벽에 갇힌 사건)조차도 대충 보면서, ‘귀엽네, 재미있네’ 정도로 보던 라이트 시청자였다. 그 덕분에 오히려 드라마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그런 내가 보기에는 왜 택이었는지가 충분히 차곡차곡 잘 쌓여왔다고 생각하는데, 정환이에게 이미 몰입해버린 사람들에게는 덕선과 택을 이어주는 작은 단서들조차 모두 정환에 대한 서사로 읽혀왔던 듯하다. 아무튼, 다 끝나고 보니 시나리오 구조상 처음부터 택이가 덕선이의 짝이었다고 보이는데, 그 이유는 덕선이의 사랑이야기 주제가 “남녀 사이에 우정은 가능한가”로 귀결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응답하라 1988에는 BGM으로 당시 유행했던 노래들이 나온다. 그 중 정봉이의 주제가이다시피 했던 “It had to be you”는 1989년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주제가다. 이 영화의 주제가 바로 ‘남녀 사이에 우정은 가능한가’였다. 해리와 샐리는 오랜 세월 동안 아무런 이성적 감정 없는 친구 사이로만 지내다가 조금씩 서로에게 젖어 들고, 어느 날 선을 넘게 된다. 해리가 샐리를 위로해주다가 같이 잠자리를 가지게 된 것. 그렇지만 친구 사이가 깨질까 두려워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친구로 지내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서 결국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 해리가 샐리에게 고백하며 해피엔딩. 나는 덕선과 택의 관계 역시 결은 다르지만 '해리x샐리'와 비슷했다고 본다. 

 

물론 소꿉친구이자 불알친구였던 택과 덕선이 남녀로 마주서는 과정은, 이미 알 거 다 아는 성인인 상태에서 만나는 '해리와 샐리'보다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와 좀더 닮아있다. 응답시리즈의 공공연한 레퍼런스인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히로는 남들보다 일년 반이나 늦은 사춘기 때문에, 히카리에게 언제나 철없는 남동생같은 친구였다. 그러나 중3 무렵 갑자기 성장한 히로를 히카리가 이성으로 의식하게 되면서 이들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히로의 늦게 도착한 사춘기는 마치, 응팔 6화 엔딩에서 눈오는 날 불쑥 영화보자는 고백 아닌 고백을 전하면서, 한참이나 늦게 등판한 택이를 떠올리게 한다.

 

 

 

 

덕선이에게 택이는 언제나 귀여운 희동이었고, 이성이 아닌 그냥 불알 친구였다. 덕선이는 택이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없고, 엉덩이도 툭툭 치고, 손도 마음대로 잡고 다녔다. 그런 그들이 사랑에 빠지려면, 친구라는 선을 넘어서 상대방이 이성으로 보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덕선이가 택의 중국 대국에 동행했던 9화 “선을 넘는다는 것”이었다. 마냥 애기 같기만 했던 택이가, 예민하고 가차없는 승부사로서의 모습도 보여주고, 담배를 피우는 성인 남자로서의 모습도 보여준 회차였다. 이때 덕선에게 택이는 낯설게 보였을 것이다. 그건 우리의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택이를 낯설게 보는 덕선이 눈빛이 시종일관 보였기 때문이다.

 

 

 

 

 

 

가출한 동룡이를 잡으러 갔다가 둘만 바다에 남게 된 10화에서는 아예 대놓고 말하고 있다. 덕선에게 날아온 공을 몸으로 막아준 택이한테 “오~ 남잔데” 하자 “그럼 내가 남자지, 여자냐”라고 택이가 말한다. (이건 극본이 대놓고 떠먹여 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자, 봐. 이제 이 아이가 남자가 되어갈 거야'라고)

 

 

 

그 다음이 중요한데, 12화 바둑 대국에서 불계패하고 돌아온 택이가, 골목에서 덕선이 어깨에 기댄 밤. 자신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택을 보며 덕선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사실 덕선이는 이때부터 자기도 모르는 새 택이를 남자로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덕선이의 이런 모습은 다른 친구들한테는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덕선은 설렘은 있었을지언정, 떨림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정환이한테 아무 감정이 없던 수학여행 당시 벽에 갇힌 때는 물론이었고, 정환이한테 들이대던 시기에 침대에서 마주본 채 눈을 떴을 때도 정환이만 숨도 못 쉬었지, 덕선이는 떨림 1도 없이 “정환아 콘서트 같이 가자”라고 말하고 다시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덕선이가 바바리맨을 마주쳤던 12화에서는 택이가 본격적으로 남자가 되기 시작한다. 덕선이는 바바리맨에게 쎈 척하며 대처하였지만, 결국은 택이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이건 둘만의 비밀이 된다. 그러고 난 후 속깊은 택이는 화장실 가는 덕선이를 조용히 따라가며 담배 피러 온 척하며 지켜준다. 항상 택이를 먼저 이끌고 누나처럼 챙겨주던 덕선이는, 이때 처음으로 남자인 택이에게 보호받고 기대게 된다.

 

 

 

 

17화, 몰래 숨어들어간 유공연수원 운동장에서 경비아저씨를 피하기 위해 택이는 발을 다친 덕선이를 번쩍 안고 달린다. 달리는 택이의 품 안에서, 덕선이는 자신이 택이를 남자로 의식하게 된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모든 관객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덕선이의 감정이 드러났지만, 사실상 극본은 그 전부터 꾸준히 택이가 어떻게 덕선에게 남자가 되어왔는가 하는 에피소드를 차근차근 쌓아왔다. 그에 따라 아이 같아 보이던 택의 외모도 조금씩 남자답게 변해간다. 그건 덕선이가 택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이고, 아마도 연출이 섬세하게 의도한 바일 것이다.

 

 

이렇듯 소녀에게 소년이 남자가 되어가는 서사를 꾸준히 쌓은 것은, 극본상 처음부터 택이가 덕선의 짝이었기 때문이다. 택이 담배 피는 설정이나, 야한비디오 보는 설정은 단지 캐릭터에 갭모에를 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덕선에게 절대 이성일 수 없었던 친구가 남자로 느껴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5년 뒤, 중국 호텔에서 만났을 때(19화) 둘의 키스가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택이 “왜 거짓말했어?”라고 묻자 덕선이는 “겁이 났어. 우린 친구잖아. 너와 어색해지는 건 상상할 수가 없어”라고 대답한다. 이 부분이 덕선이의 ‘사랑과 우정 사이’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데, 택이한테 남자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었지만 이 감정이 덕선이한테는 너무 낯설었던 것이다. 택이 남자로 느껴지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는데 그 일이 일어나버렸다.

 

그런데 선우나 정환이라면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놈들에게  마구 화낼 수도 있고 “다신 안봐”라고 소리지를 수도 있었지만, 베프인 만옥·조현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던 우리 택이, 나만이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택이와 서먹해진다는 것은, 그런 택이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마치 까탈스런 자기를 다 알고 있고, 자기 모든 속을 다 털어보일 수 있는 소중한 친구 해리를 잃기 싫었던 샐리처럼 말이다.

 

 

 

 

남편찾기가 종결되는 19화, 택이가 있는 중국으로 가기 직전, 스튜어디스 동료가 덕선이에게 말한다. “야,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딨냐”라고. 이 대사는 덕선의 러브 스토리 주제를 함축해서 말해준 한 마디임과 동시에 '이제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덕선에게 출발신호를 주는 신호탄 같은 대사였다. 

 

결국 응팔의 남편찾기는 덕선에게 택이가, 소년에서 남자가 되기까지를, 우정에서 사랑이 되기까지를 보여준 길고 긴 여정이었던 것이다.

 

 

 

 

 

 

 

 

 

 

<응답하라 1988 리뷰 시리즈>

 

리뷰 1)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1 

리뷰 2)  우리는 덕선과 택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  http://dustysnob.tistory.com/62 

리뷰 3)  90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나  -  http://dustysnob.tistory.com/66

 

<응답하라 1988 MV 시리즈>

 

사랑스런 덕선이에게 바치는 헌정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정환이를 위한 MV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과 덕선, 그들이 사랑하기까지  -  http://dustysnob.tistory.com/60

택이와 쌍문동 5인방을 추억하며  -  http://dustysnob.tistory.co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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